가톨릭 문서

천주실의(天主實義) - 마테오 리치(예수회 선교사)의 저서

프로필

2014. 3. 1. 1:43

이웃추가

서문
온 천하를 화평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상의 도리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함’ 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자와 성인들은 신하들에게 충성스런 마음을 권하였습니다. 충성은 두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오륜은 군주에 관한 것을 첫째로 삼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삼강 중에서 으뜸입니다. 무릇 바르고 의로운 사람들은 그 점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옛날에 사회가 혼란하여 여러 영웅들이 나누어져 전쟁을 하고 있어서 아직 진정한 군주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에도, 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은 정통성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깊이 살펴서 오직 몸을 바쳐 그를 위해 순절 하였고, 혹시라도 충성스런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라에도 주인이 있는데 천지에 유독 주인이 없겠습니까? 나라가 하나의 군주에 통섭되는데, 어찌 천지에 두 주인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군자라면 우주의 근본이요, 창조와 생성의 으뜸을 반드시 잘 인식하여 앙모하고 사색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의 온갖 영화와 권세를 탈취해도 오히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천주의 자리까지 넘보려 하여 인간의 자리를 뛰어넘어가 그 천주의 존위 위에 군림하고자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늘만은 높아서 사다리를 타고도 올라갈 수 없으니, 천주의 자리를 가로채려는 인간의 욕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을 참칭하는 저 못된 인간들은 사악한 이론을 그릇되게 퍼뜨리고 약한 백성들을 기만하고 오도해서 천주의 자취를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저들 사악한 인간은 망령되이 사람들에게 물적 이득과 행복을 약속해주고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흠숭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저를 천주를 참칭하는 사악한 인간이나 이들 오도되어 사악한 인간을 천주로 받드는 어리석은 사람 모두가 천주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애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어 세세 대대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 까닭을 생각해 보는 이는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찌 천주를 참칭하는 도둑을 주인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인은 나타나지 않고, 못된 무리들이 서로 부채질하며 날뛰고 있으니 참되고 성실한 도리는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온 세상을 널리 유람하였으며, 이런 천주모독의 지독한 폐해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저는 중국이란 요순의 백성들이요, 주공과 중니(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민족이니, ‘천리’와 ‘천학’은 결코 달리 고쳐져서 이단으로 오염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간간이 오염된 바 있다고 생각되어, 저는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논증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저는 먼 나라에서 온 외로운 나그네이므로 저의 언어와 문자는 중국과 달라서 입을 통해서나 손가락을 움직여서는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재질은 못났기에, 분명하게 하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용이 혼미해질까 두렵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개탄하는 마음을 품어왔습니다. 20여 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읍소하며 기도했습니다. 천주께서 이 살아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어,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해왔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 두어 친우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제가 중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를지라도, 도둑을 보고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정말 안 되니까 혹시 인자하고 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가 제 외침을 듣고서 분연히 일어나 그 도둑을 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제가, 중국 선비들이 우리 천주교 신부들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구술로 답한 것이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된 것입니다. 아아! 어리석은 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장님이 하늘을 보지 못하여 하늘에 태양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햇빛은 실재하는데 눈이 스스로 볼 수 없을 뿐이지, 어찌 태양이 없지나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주의 도리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또한 살피려고 하지 않아서 하늘이 주재함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형상은 없지만, 완벽한 눈이어서 보지 못하는 바가 없고, 완벽한 귀여서 듣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완벽한 발이어서 이르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비유하면 하늘의 주재함은 착한 자식에게는 부모님의 인자한은 덕과 같으나, 못난 자식에게는 재판관의 엄혹한 위엄과 같습니다. 무릇 선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최고의 존자’가 있어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만약 이런 존자가 없거나 혹은 존재해도 인간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무신론이나 헛된 생각은 선을 실천하는 방도를 막아 버리고 악을 저지르는 길을 크게 열어 놓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천둥 벽력이 단지 고목만을 치고 곧바로 불인한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위에 주님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이는 천주가 죄를 벌하는 것은 엉성한 것 같으나 놓치는 일이 없으니, 늦어지면 그만큼 벌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들이 이런 ‘최고의 존지’를 흠숭하는 것은 분향 드리고 제사 지낼 때만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이 되는 아버지’ 이시며 조화시키는 큰 공능을 항상 행각하면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은 그분이 반드시 지극한 지혜로써 이 세상을 경영하고, 지극한 능력으로 이 세상을 개개 사물과 만류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모두 결함 없이 해 주심을 되돌아볼 때 비로소 대륜(大倫)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주의 이치는 은밀하여 분명히 밝히기 어렵고, 범위가 넓고 넓어서 다 알기가 어려우며, 안다 해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배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비록 천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해도, 이 적음의 이로움은 오히려 다른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 천주실의를 읽는 이들이 문장이 미미하다고 해서 천주의 뜻을 미미하게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천지도 천주를 다 실을 수 없거늘, 이 작은 책이 어찌 다 실을 수 있겠습니까?

 

 


때 1603년 7월 보름의 다음날(7월 16일)
마테오리치 씀


상권
제1편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을 주재하며 안양하심을 논함
중사왈(中士曰): 자기를 닦아서 공을 이룬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면, 인간은 그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덕을 닦지 못한다면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덕이 결여된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지가 있어 거기에 도달하면 그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덕을 언제까지(현세) 닦아야하고 그 완성(死後?)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며 그 사후세계는 어떠한 것인가?
선생의 나라에서는 천지를 창조한 천주를 받들고 그 분의 주재하심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껏 들어보지도 논해본 적도 없습니다.
서사왈(西士曰): 천주의 도리는 이미 서양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받들고 있으며 천지 창조와 강생구속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현자를 통해 경전으로 이어오고 있으나 이곳 중국의 유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천주의 이 보편적 교의가 참된 것임을 증명해 보이고자하며 우선 그 가르침이 의거하고 있는 이치만을 설명하겠다.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사유능력이라고 하는 이성 능력(영혼의 능력)이 있으며 이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며, 사물의 이치를 보고 그 원인과 결과를 따져 물을 줄 안다. 이런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참인 것이며 이는 마치 태양이 세상을 두루 밝혀주고 있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버리고 남의 말만을 추종한다면 이는 지월지식(指月之識)에 불과한 것이다.

만물의 주재자이신 천주의 존재(esse)물음에 대한 그의 증명
1. 인간에게는 배우지 않아도 능히 무엇을 알 수 있는 양능(良能)이 있으며, 따라서 만민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최고 존자를 섬기고자 한다.
2. 만물의 이치를 보면 저마다 자기의 목적을 가진다. 이런 대자연의 변화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마다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런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천주이다.
3. 질료적 존재가 어떤 이성적 영역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성을 가진 존재가 이끌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함에 대한 증명
1. 모든 개체는 스스로 완성될 수 없으며 반드시 외재적인 운동인이 있어야만 한다.
2. 이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물들이 질서적으로 배열되어 존재한다면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는 필연 존재해야 한다. 태초에 지극히 이성적인 주님이 이런 성질들을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만물의 조화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3. 각각의 모든 생명체는 그 시원이 존재한다. 이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근원자가 있어야 하는데 천주가 바로 근원자이다.

 

천주는 누구에 의해 생겨났는가에 대한 해명
천주는 만물의 근원이며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존재이다. 모든 존재는 자체에 내재된 자기의 理와 氣의 음양대립적인 자체의 운동에 의해서 스스로 생성소멸 할 수가 없고, 그 존재가 자기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외적, 초월적 존재자의 힘이 부과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사물은 사원인(四原因: the efficient, formal, material, final cause)을 갖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질료인과 형상인(가시적인 것)은 중국식의 음이요, 양이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서구의 자연관과 중국식 음양사상은 다른 개념이다) 운동인과 목적인(비가시적인 것)은 사물을 초월해 있다. ‘사물의 소이연(所以然)’이란 뜻은 운동인과 목적인을 말한 것이고 형상인과 질료인을 말한 것이 아니다. 자식의 소이연은 부모이듯이(이는 개별적 소이연을 말함) 천지에는 무수한 각자의 소이연을 갖고 있다. 이 개별적 뿌리와 바탕은 하나로 이루어질 수 없으나 보편적 소이연은 둘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초적 소이연(보편적 소이연)즉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규모 음악을 연주할 때 개별적 음향의 소이연은 연주자이나 이 개별적 운동인과 목적인을 포괄하는 지휘자가 없다고 한다면 불협화음이 조성될 뿐이다. 그러나 대우주와 소우주는 완벽한 화음을 갖고 있다. 한 집안에 한 가장이 있고 한 나라에 두 군주가 있을 수 없듯이 세계를 포괄하는 하나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음은 명백하다.


천주의 존재양식에 대한 보충 설명
개미와 같은 미미한 벌레라도 그 본성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또한 식물성, 동물성을 모두 포괄하는 인간의 본성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다.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들은 부류〔類, genus〕로 배열되어 있어 이 류를 따져 그 개체들의 같고 다른 점, 보편적 특성을 헤아릴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인간이 속한 류의 보편적 특성을 추상하면 된다. 그런데 천주는 이 류에 속하지 않고 초월해 있는 분이다. 어떤 범주도 허용되지 않는 그런 분이다. 그렇다면 그런 천주를 흠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천주는 무시무종, 무궁무진하여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다. 따라서 천주는 via positiva 보다 via negativa적 표현이 천주를 더 많이 포괄한다고 보며, 이런 방식들로 밖에 그를 알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시 우연 유이기 때문이다. 천주는 성인들(예컨대 공, 맹자의 현세적 인생관을 겨냥하며)의 수양적 덕성(무명에 빠진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낸 자들)보다도 이를 초월한 우주적이고 보편적 덕성 그 자체이다. 때문에 천주의 이 초월적 존재양태로 말미암아 존재 사물 중 그분의 은덕을 입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주는 존재자들에게 자신을 분유하며 이 때문에 모든 개별자들은 존재의 선성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존재자들은 그분께로 소급(회유)된다.


제2편 세상 사람들이 천주를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풀이
유교(太極說), 불교(現想=空), 도교(道)에 대한 비판
유교의 교리는 진실로 인간의 도리에 가까우나 하나의 큰 이치로 그 밝은 도리를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유, 불, 도 삼가는 지금껏 많은 분쟁이 있어왔지만 천오백여년 동안 그들은 하나로 회통하지 못하였다. 통탄하는 것은 말로써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것만 못하고, 말로 가리는 것은 이칠 분석함만 못하다.(사실 이들은 같은 것을 다른 토양이 문화적 언어로써 설명하고 있으며, 코끼리라는 큰 실체의 부분 부분의 양태만을 짚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 소통 가능하다. 마테오리치는 동양적 사고의 불교(佛), 도교(道)에서 나타나는 즉, '있음'을 '있음'에서 출발하지 않고 부정에서 출발함을 비논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는 본인이 볼 때, 서양적 either or의 논리를 동양적 both and의 논리에 일방적 적용에 기인한 결과로 판단한다)
만물의 근원이 무 또는 공(서양적 자연관은 4개의 근원을 가짐)하나만을 가진다면 없는 것에서 어떻게 만물들에게 질료〔matter, 形와 형상〔form, 性〕을 부여하여 실체를 부여할 수 있으며 운동인과 목적인이 될 수 있겠는가?
〔질료와 형상의 이중적 의미: 질료는 구성재료와 형태까지(육체) 포함, 형상은 물체의 형상과 성질(영혼)을 포함한다. ‘없음’에 대한 리치의 오해: 불교의 무는 대상적 무가 아닌 인식적 태도를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근원적 있음에 대해, 서양적 사고는 창조설로 논리의 일관성을 획득하지만, 불가(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논리)에서는 시원을 알 수 없는 ‘그냥 그렇게 본래부터 있음’으로 해명하여 동양적 소박함을 보인다. 이 때문에 생멸(시작과 끝)에 대한 불교적 사고가, 논리적이고 분석적 경향을 지닌 서양사람 리치에게는 생멸에 대한 해명이 모순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인 창조설적 논리에 의하면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풀이되며 이를 소급해 들어갈 때 필연적 존재자가 밝혀진다. either or의 논리와 both and라는 방법적 선 구조에 따라 이해에 대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런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지리, 풍속, 언어 또는 심성적 차이에서 기인하겠지만...〕


중국선비 문: 불교와 도교의 공과 무는 실제 공과 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형체나 소리가 엇는 정신(신)을 말함인데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천주와 무엇이 다른가? 에 대한 해명
불교 도교의 단순한 정신이나, 천주는 재능도 본성, 덕이 있으며 육체를 가진 모든 존재자에 대하여 더욱 비교를 불허하는 고매한 차이가 있다.


유교의 태극설과 천주에 대한 해명
유교의 군자들이 섬겼다는 태극은 다만 추상적 관념에 불과하며 천주에 대한 이론이 될 수 없다. 무극이태극의 도는 단지 홀수와 짝수의 형상을 취하여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짝수나 홀수는 독립적, 추상적으로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를 창조하지 못한다. 구체적 사물들 속에 깃들어 있어야만 된다. 실제적 내용이 없는 추상적 관념은 만물의 근원으로써 믿을 만한 理가 있을 수 없다.


태극이 바로 그 이(理)인데 그보다 더한 이가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명
만물의 존재양태는 실체(substantia)와 속성(accidens)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개체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개체의 예는 하늘, 땅, 인간, 동물, 식물, 돌, 지수화풍 등이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 속성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오상(五常),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칠정(七情) 등이다. 예컨대, 힌 말(馬)에서 말은 단 하나의 실체이다. 그러나 ‘힌’은 속성이며 이 속성은 우유적 속성들이며 다양한 속성들이 있다. 따라서 실체가 우유보다 앞선다. 철수가 하나의 실체라면 이 철수는 9개의 범주적 조건(감정, 목소리, 얼굴 색, 윤리습관 등) 위에 서 있기에 그 속성은 매우 많다. 태극이 단지 이라고 해석된다면 그리고 사물 속에 기착되어있다면 그것은 천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이’ 역시 속성의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사물은 없다. 주자의 이가 만물의 근원(先在)이라는 주장에 대해
자식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고 신하가 없으면 임금도 있을 수 없다. 경험세계에 사물이 실재하면 그 사물의 이도 있게 되고, 실재하지 않으면 그 이도 실재할 수 없다.  만약 경험적 세계에 없는 이가 만물의 근원이라면 그것은 붓다나 노자의 말과 다름이 없다. 먼저 경험적인 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실체도 이와 더불어서 실체일 수가 있지 이 단독으로 근원은 될 수 없다. 이 관념적인 이가 어찌 사물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가 이성능력도 지각능력도 없다면, 이성능력도 지각능력도 만들어낼 수 없다. 이성능력이 있는 존재만이 오직 이성적 존재(인간=생혼, 각혼, 영혼)를, 지각능력이 있는 자만(동물=각혼)이 지각능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창조, 출산, 만듦)
태어나는 자식은 출산하는 어머니의 능력을 넘어설 수 없는 법이다. ‘이’는 사람보다도 비천한 것이다. ‘이’가 사물을 위한 것이지 사물이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도 “사람이 도를 널리 펼칠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널리 펼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가 만물의 이성능력을 함유하고 만물을 조화, 생성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천주이다. 공자가 말한 태극이 이성과 만물을 조화시키는 틀이라면 그것은 천주께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태극은 만물의 제일 원인(causa prima), 필연유에 들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섬기는 上帝는 곧 天主이다.


하늘은 곧 천주이니 하늘을 받듦이 곧 천주를 향한 흠숭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명: 천주의 존재양태에 대해서
푸르고 푸른 형체가 있는 하늘이 천주의 존재양태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천주를 멋대로 풀이하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로 결합되어있는 사람의 이치도 아직 모를 뿐만 아니라 또한 천주에 의해 창조된 물리적인 하늘의 천문 현상 및 각종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이치도 모르는 것이라 하겠다. 우주 안에는 우리들 인간을 양육하기 위한 것이 아닌 사물들은 하나도 없으니 우리는 마땅히 천지 만물의 은혜로운 주인이신 천주께 감사드리고 흠숭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본인 천주를 버리고 거꾸로 인간들에게 부림당하고 있는 물리적 天地를 공경함은 부당한 것이다. 물리적 천지에 제사지냄은 보이는 하늘만을 있음으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천주는 없음으로 여기는 우를 범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주는 하늘보다 앞서 계시니 선천(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


제3편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여 동물의 각혼과 크게 다름을 논함
中士曰: 하늘아래 존귀한자가 있으니 그것은 오직 인간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셋을 이룬다’(人參天地) 그런데 세상에는 사실 인간보다도 동물이 더욱 유유자적하며 근심걱정이 없고 애써 먹을 것을 구하지 않고도 항상 풍족하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늘 고통 중에 있고, 전쟁과 빈곤에 시달리며 설사 군자라 할지라도 정신노동을, 소인들은 육체노동을 해야 하며 현세의 고통은 영원하고 현세의 쾌락은 한정이 있으니 현세의 이 고통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천주께서 이런 환난의 세상에 인간을 낳게 함은 무슨 연유인가?
西士曰: 세상에 사는 이들은 마음이 혼미하여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현세에서 구하고자 하니 삶은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은 본시 동물이 사는 곳이지 인간이 기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잠시 기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들의 본집은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다. 도리를 닦은 사람은 내세에 반드시 천당에 올라가 무궁한 복락을 얻고 지옥에 떠어져 재앙을 받는 일은 면하게 된다. 천당과 지옥의 도를 설하는 붓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도용한 것이 분명하다. 사 후 인간이 각자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기위해서라도 영혼은 불멸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선자와 악자가 응분의 처벌과 보상이 없다면 이 세상은 불공정한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동물과 크게 달라 불멸함에 대한 성찰
초목은 생혼(生魂)을 가지고 있고 동물은 각혼(覺魂)을 가지고 있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지각하고 장소이동을 한다. 사람은 영혼을 가지며 이 영혼은 생혼과 각혼을 모두 가지고 있다. 동식물이 죽으면 그 혼도 사라지지만 인간이 죽으면 생혼과 각혼(감각능력. 이 감각능력은 토마스는 영혼의 한 부분이라고 보는데 탐구 후 삭제 요망)은 함께 소멸하나 영혼은 남게 된다. 지각이 하는 일은 몸에 의지하고 있다 몸이 형체가 흩어지면 각혼이 작동할 장소도 없어지게 된다. 수동지성은 그렇게 육체와 함께 사멸하지만  추론과 판단인 능동지성인 영혼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동식물과 다르다.


혼이 몸에 어떻게 의지하고 있는가의 개념에 대한 해명
특정감각인 이목구비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다. 공통감각인 사지는 차가움, 뜨거움, 딱딱함, 부드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봉사, 귀머거리, 미맹인자들은 이 기관이 있어도 인식할 수 없다. 공통 감각은 몸에서 멀리 있으면 인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똑같은 귀가 있는데 어떤 자는 듣고 귀머거리는 들을 수 없음은 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각혼은 몸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사멸하면 필연 그 혼도 사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혼은 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각혼과 같이 몸에 종속되어 있다면 몸의 지배를 받아서 올바론 사리분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이 소멸하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에 그렇다. 영혼은 모순됨이 없으니 불멸하다. 예컨대 세상의 모든 사물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원소에 의해 결합되어 생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불의 성질은 뜨겁고 마르게 하는 것이니 물과는 배치된다. 이렇게 한쪽이 승하면 필연 다른 한쪽을 해치게 되니 사멸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의 영혼은 물질 즉 4원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 모순될 일도 없으며 따라서 존재한다.


동물의 혼은 어떻게
첫째, 생혼과 각혼은 몸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며 항상 몸에 부림을 당하다가 몸이 사멸하면 함께 사멸한다. 때문에 동물은 자신의 본능대로 살 뿐이다. 만일 생, 각혼이 몸을 주재한다면 동물은 사리분별을 하여 본능을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동물은 본능대로 살지 않는가? 오직 사람의 영혼만이 육신의 주재자가 되어 자유의지대로 산다.
둘째, 다른 생명체는 오직 하나의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두 마음을 겸하고 있으니 그것이 수심(獸心)과 인심(人心)이다. 전자는 물질성이고 후자는 정신성이다. 예컨대 인간은 술고 여색을 탐하다가도 그것이 도리가 아님을 반성하게 된다. 이 상반되는 모순은 결국 두마음이 한 근원에서가 아니라 다른 근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형체를 가진 것들은 같은 부류의 형체를 가진 것들을 선호한다. 그러나 형체가 없는 영혼은 형체가 없는 것들을 선호한다. 영혼은 선을 덕으로 여기고 악을 죄스러워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니 이 태도들은 모두 무형한 것들이다. 사람의 본성은 유형한 것과 무형한 것, 양쪽을 다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인간의 영혼은 ‘정신’인 것이다.
넷째, 유형한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수용자의 모습대로만 수용된다. 그러나 영혼은 모든 만물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예컨대 소, 말, 나무, 물고기 등의 모든 존재자들은 추상하여 관념화시켜서 수용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사물을 관념화 할 수 있는 것, 즉 마음의 작용은 정신인 것이다.
다섯째, 형체가 있는 것들은 형체가 없는 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귀신이나 무형한 것들을 인식하니 이는 정신의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위의 다섯 가지 理致가 중국 지성들에게는 명확한 근거가 없어 보이는 것인가?
여섯째, 감각적 지각은 작은 그릇과 같아서 한계가 잇고 넓지 않다. 무형한 마음은 크고 광활하여 작은 그릇에 제한 받지 않고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통달한다. 예컨대 참새는 발이 묶이면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무형한 마음은 앉아서도 추리력을 통해서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며 숨겨진 실체를 훤히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유형한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 영혼은 정신이니 소멸할 수 없다. 사람이 도리를 닦아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영혼불멸(靈魂不滅)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혼은 그의 행적에 따라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제4편 귀신 및 사람의 혼에 관한 이론을 분석하고 천하 만물(天下 萬物)은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풀이함
중국의 많은 왕들은 정치를 위하여 곁에 있지 않는 조상이나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그 가호를 빌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돌아가신 선조가 죽은 후에도 그 후손들을 도울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신령에 대한 해명
혹자들은 ‘천지 사이에 귀신은 없다’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믿으면 있고 안 믿으면 없다”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이들의 주장들은 모두 귀신의 존재를 공격하지만 자신의 잘못됨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믿고 안 믿고에 따라서 어떤 것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는가? 천지의 가장 위대하고 지존한 분을 논한다면서, 어찌 그런 애매모호한 말을 쓸 수 있겠는가? 무릇 사물이란 실제로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색깔도 형체도 없는 정신적 존재를 육안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귀를 가지고 고기의 맛을 보려함과 같다. 이목구비의 감관으로 사물을 식별할 때조차 인간은 이성의 식별에 의하지 않고는 그것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의 드러난 것으로(sence data) 숨겨진 것을 추리하고 그렇게 된 까닭을 검증해 낸다. 즉 만물에 속해있는 실재 주재자를 증명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도 다른 방법이 없다.


『춘추전(春秋傳)』에 “정나라의 백유가 죽은 뒤에 ‘여’라는 귀신이 되어 형체로 보였다”고 기록되었다는데...
그런 기록이 사실이라면, 옛날 춘추시대에도 사람의 혼이 없어져 버리지 않음을 이미 믿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세속의 선비들이 귀신을 비난하고 천박하게 여김은 오히려 『춘추』를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백(질료)이 죽었을 뿐 혼이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일단 죽고 나면 생전의 능력보다 더 월등하고 순수해지게 됨으로 그런 혼령들의 월등한 능력을 괴이하게 보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사람의 혼이 비록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워한다고 할지라도, 어찌 집안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겠는가?
무릇 죽은 영혼이 다시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천주께서 그 일로 하여금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신 것이다. 혼은 본래 형체가 없다. 혹시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반드시 허상에 의탁하여 보여 진 것이다. 죽은 뒤에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다 알기를 천주께서 원하시기에 그런 것이다.


기(氣)를 귀신이나 영혼과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사물들의 부류에 대한 실제 이름(實名)을 문란케 하는 것이다. 혼을 기와 같이 보는 중국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류’의 ‘관념’〔즉 ousia〕들이 각각 그 ‘부류’에 합당하게 본래대로 이름 지어져야 한다. 옛날 경서에서 기를 말하고, 귀신을 말하는 글자가 같지 않았다면 그것들의 이치들 역시 다른 것이다.
한번 물어보겠는데 기는 어느 때에 흩어져서 다 없어지는 것입니까? 새나 짐승은 언제나 자기의 명대로 죽지 못하는데  그들의 기는 빨리 흩어집니까? 늦게 흩어집니까? 어째서 그것들은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까?
공자가, “귀신은 만물을 몸으로 삼는다.” 고 말한 뜻은 그 귀신의 능력이 성대함을 이른 것이지 사물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사물마다 다 귀신이 있으며 그 귀신들은 저마다의 사물을 이끈다. 그러나 그 귀신들은 저마다 차이를 보인다. 그 중 가장 신묘한 것이 영혼이니 다른 동물들의 귀신과는 다른 것이다. 중국 선비들은 사물들의 부류와 등급을 어지럽게 뒤섞어놓고 그 문제점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우리 서양의 학자들은 사물들의 분류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들은 ‘만물의 분류도표(分類圖表)’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 속성의 부류들이 너무 많지만 개괄한다면 그 속성은 9가지로 크게 분류된다. 만물은 실체와 속성이 있다.


實體(beings): 양, 질, 관계, 능동, 수동, 시간, 장소, 위치, 습성


이런 모든 사물에는 각각 일정한 부류가 있어 어떤 것은 이성적인 것에 속하고 어떤 것은 어리석은 것에 속한다. 동식물들이 모두 이성적이어서, 사람들과 똑같다고 말한다고 한다면 서양 선비들이 얼마나 대소하겠는가? 만물의 분류도표를 살펴보면, 세상에는 진실로 ‘있음’과 ‘없음’, 이 두 가지만이 사물들의 서로 다른 부류들은 변별해 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유형한 것’이 하나의 부류(部類)라면, ‘무형한 것’은 다른 부류이다. 또 ‘생명체(生命體)’가 하나의 부류라면, ‘무생명체(無生命體)’는 다른 부류가 된다. 부류의 본성을 잘 아는 사람은 각 부류가 하는 행동을 본다. 그리고 부류들이 지향하는 바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새나 짐승들은 귀신들이 그들을 이끌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이 정한 필연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부류는 이성적인 의지로 움직인다.


본시 기는 같으며 하나이다. 따라서 이에 의해서 파생된 형상들은 다양할지라도 다 같은 것이 아닌가에 대한 해명
살아있는 호랑이와 살아있는 사람이 단지 모양만 다르다고 말한다면 합당치 않다. 모습이나 형태만으로 사물들을 구분하면 이들은 대체로 서로 같은 것이요 다른 부류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기를 정신으로 본다면 살아있는 것이 무슨 연유로 죽게 되며 죽은 것은 여전히 기를 가지고 있는데 왜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기는 사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본이 아니다. 기는 4원소 중에 하나입니다. 무릇 귀신은 사물로 분류되지 않는 무형하고 특별한 존재의 부류이다.


우주 만물의 본성은 선과 이치를 가지고 있어서, 사물들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어도 本性은 일체라고 중국 현자들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천주이신 상제도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여 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고 말씀하셨으며 불멸하는 본성은 육체의 멸에도 없어지지 않고 그분께로 돌아간다는데, 중국 선비들의 말씀도 사람의 魂은 없어지지 않음을 말했다. 그렇다면 천주의 교리와는 합일되는 것이 아닌가?
천주의 경전이 전하는 말에는 옛날 천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신들의 무리도 창조하셨다. 그 가운데 교만한 루시퍼가 있는데 이자는 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옥이 생겨난 것이다. 무릇 창조물과 조물주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다.


부처는 하느님에 비해 손색이 없다. 그들은 법도를 만들었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며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세상을 안정시킨다. 앞선 성인들의 공적이 없이 하느님 혼자서 스스로 짓고 스스로 세워 지극한 통치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의 마음 역시 우주와 같이 넓으니 인간의 추상능력은 천지사방 막힘이 없으니...
오만이란 모든 미덕의 원수이다. 일단 마음에서 오만이 길러지면, 다른 모든 덕행은 모두 망하게되는 것이다. 성인과 오만한자의 차이는 바로 겸손과 교만으로 알 수 있다. 천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천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마치 ‘붉은 인주’로 종이나 비단에 찍는 것과 같다. 종이와 비단에 찍힌 것들은 스스로 도장의 역할처럼 다른 종이에 찍어낼 수 없다. 슬기로운 이의 마음은 천지를 포함하고, 만물을 갖추고 있지만, 진짜 천지 만물의 몸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주가 사물 속에 있으며 이런 사물들이 내면적 성분의 하나라고 말한다면, 천주와 사물이 같다라고 말한다면...
천주가 개개의 사물이라고 말한다면 우주 사이에 천주와 만물이라는 두 본성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본성이 없다면, 이것은 천주와 구별되는 만물은 없는 셈이니, 이는 사물의 이치를 혼란케 하는 것이다. 사물들에는 불변하는 본성이 있는데, 이것들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보존하려하고 헤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천하 만물은 서로 헤치고 죽이는 일이 있다.
천주 자신이 사물이라면, 천주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해를 끼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진정 사물을 창조하신 천주께서는 사물들을 죽이고 해를 끼쳐야 할 이치를 갖고 있지 않다. 천주와 우리 자아가 한 몸이라면, 우리 자신이 곧 하느님이며, 우리는 하느님께 제사지내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하는 제사일 뿐, 이러한 예식은 있을 수 없다.
둘째, “천주는 사물의 내면적 성분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천주는 사물보다 미미한 것이다. 천주가 내면의 성분이라면, 그 성분을 싸고 있는 사물은 천주보다 더 크다는 우매한 결론 밖에 나올 수 없다. 만약 사람 속에 주님이 한 몸을 오로지 잡고 계신다면 세상에는 악을 행하는 이가 없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악인들이 많지 않은가?
셋째, “만물은 몸체와 같은 것이니-마치 목수가 자기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천주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천주는 더욱 그 사물 자체는 아닌 것이다. 천주는 자기가 창조한 사물이 아닌데 어찌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천주는 삼라만상의 사물을 생기게 하였다. 우리가 그 근원을 미루어 따져보면 지극히 정교하고 성대하여 우러러 생각하고 애모하는 마음을 버려도 되는 때는 없다. 우리는 큰 발자국을 보고 그 주인을 짐작하지만 그 발자국이 주인 자체는 아니다.  혹 속성이 실체 속에 있는 것은 ‘흰’이 말속에서 흰 말이 되고, ‘차가움’이 얼음 속에 있어서 ‘차가운 얼음이 되는 것과 같다. 천주께서 혹 사물 속에 계신다는 것은-마치 햇빛이 그것에 의해 비추어진 수정 속에 있음과 같은 말이다.


하권
제5편 윤회의 여섯 방도와 살생을 금하는 오류를 논박하며 재계와 소식을 올리는 바른 뜻을 논함
中士曰: 불교에서는, 현세의 삶이 불행이라면 그것은 전생에서 악행을 한 원인이요, 또 현세 삶 여하에 따라서 내세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천주교에서도 현세의 삶은 완전한 것이요, 그 완성은 내세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불교의 전생교리도 논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아닌가?
西士曰: 서양의 고대 그리스에 피타고라스라고 부르는 자연 철학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악행을 일삼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기의 명성을 가지고 하나의 이론을 만들었는데, 예컨대 전세에 악을 하는 자 현세에서 벌을 받고, 금수로 태어나며, 현세에서 선행하는 자는 내세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복을 받는다고 설했다. 그의 제자 중 몇몇은 이 교리를 국외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인도의 석가가 종교를 세우는데 이용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가 말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면 그것을 따라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윤회설의 어그러진 도리는 다 헤아릴 수 없다.
첫째, 만약 사람이 죽어 내세에 다른 동물로 태어났다면, 그가 본래 지니고 있었던 지능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그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할 수가 없으며 들어본 일도 없다. 불교와 도교의 책에는 전생의 일들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불교와 도교이전에는 그런 일들이 없었는데, 그런 일들이 있게 된 것은 분명 그 종교가 있고 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거기에 소속된 무리들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금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지역을 불문하고 많은 현자들이 이것을 기억하고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 그렇지 않고 있다
둘째, 하느님께서 최초로 사람과 짐승을 창조하실 때 죄지은 사람을 반드시 짐승으로 변조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사람이나 짐승에게 각각 자기 본래의 혼을 부여했을 것이다. 만약 지금의 짐승이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징승의 혼과 옛날 짐승의 혼은 다를 것이다. 분명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있다는 말을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셋째, 혼에는 세 종류가 있다. 초목에 해당하는 생혼, 동물에 해당하는 지각능력인 각혼, 지성능력에 해당하는 사람의 영혼이다. 사물들을 분류함에 단지 겉모양으로만 그 본성을 정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그 혼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검증하는 방법은 이성의 능력에 달려 있는데, 예컨대 초목의 혼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들은 그저 자라기만 하고 특별히 지각하지 않는 것을 보고 경험적 자료를 가지고 이성의 추상하여 그것에는 生魂만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이렇듯 분명한데, 불교에서는 “짐승의 혼과 사람의 혼이 똑같이 영험하다”고 말하니 심히 어긋난 것이다.
넷째, 사람 몸의 생김새가 다른 짐승들과 다르다면 이들의 혼 또한 다를 것이다. 예컨대, 목수가 의자를 만들 때는 목재를 쓰고, 예리한 칼을 만들 때는 쇠를 쓰듯이 사람도 짐승과 다르니 분명 형혼도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 영혼은 각자 사람의 몸에 합당할 뿐이지 짐승의 몸에는 합당치 않으므로 불교의 이치는 어긋난 것이다.
다섯째, 악행을 일삼기 좋아하는 자들은 차마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것을 하기에는 꺼림직하니까 차라리 내세에서는 자기의 얼굴을 고칠 수 있으니까 마음 놓고 악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수치로 여기는 것은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윤회라는 거짓되고 허황된 말은 악을 막고 선을 권하기에도 무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입히고 있다.
여섯째, 불교에서 살생의 금지를 말하는 뜻은 혹 도살당하는 짐승이 우리 죽은 형제나 부모가 아닐까하여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것과 그들을 농사일에 수고롭게 고생시키는 것은, 죄질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 짐승이 자기 부모라고 믿고 있다면, 또 그럼에도 그 짐승을 자기이익을 위해 부린다면 이는 더욱 불륜적인 것이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사람이 죽은 뒤 가축이 되지 않는 사람끼리 윤회한다면
사람의 혼이 짐승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이론을 믿게 되면 축산의 용도가 황폐해질 것이다. 사람의 혼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믿는다면, 혹 내가 결혼을 할 때 결혼할 여자가 진실은 내 돌아가신 어머니였다면, 이는 커다란 불륜이 되는 것이므로 그런 이론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의 혼이 불멸하다면, 지금껏 죽은 무수한 영혼들은 온 우주를 가득 채울게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우주가 아주 광활함을 알지 못하고 우주가 쉽게 채워질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음과 같고, 정신의 성질과 양태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것들도 장소를 차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형체 있는 것은 장소 안에 있기에 공간을 채운다. 그러나 정신은 형체가 없기에 공간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불살생의 계로써 자연을 보호하는 유익이 있다면, 어찌 천주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천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것들을 오직 인간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짐승의 고기는 사람의 건강을 조류의 깃털은 사람의 옷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모든 유실수들은 사람의 양식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이것들을 취하여 사용치 안겠는가!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의 혼이 짐승으로 변하는 이치가 없음을 명백히 증명했기에 아울러 살생의 금계가 부당함을 말한다.


세상 물건 중에는 인간에게 해로운 짐승이나 독충들이 있는데, 이것들조차도 사람에게 이로운 것으로 창조되었는가?
천주께서 창조하신 사물들은 그 쓰임새 또한 신묘하여 하느님은 이들을 통하여 혹 인간이 계율을 등한히 할 때 자연재해 등으로써 이들을 이용하시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재앙 등을 통해서 현세의 삶보다도 하늘의 삶이 더욱 값진 것을 깨닫기도 하고 인간의 무상함을 인식하기도 하여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하느님을 거역할 때 사물 또한 비로소 인간을 거역하는 것이다.


초목이 비록 생물의 부류이긴 하지만, 피도 없고 지각도 없으니 이것은 짐승과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도들은 이 초목에는 자비를 보이지 않는데
초목의 수액도 일종의 피 이기에 피가 반드시 붉을 이유는 없다. 채소 중에는 붉은 액을 가진 것들도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그것을 먹으며 엄금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짐승의 피는 중하게 보면서 초목의 피는 가볍게 보는 것인가? 서방 오랑캐족인 회교도들은 돼지를 먹지 않는다. 한나라에 돼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온 세계가 돼지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을 칠 사람도 없을 것이요 따라서 번식이 불가능하여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익한 것들을 애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도리어 가축에게 해로운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행하는 재계의 의미
불교의 살생의 금계 때문에 소식(素食)을 한다면 이는 약간의 동정심(同情心)이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성현들이 전해준 교리에 입각하여 윤리적인 행위를 하며, 혹 과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았다 하더라도 인간은 유약하니 이를 귀감으로 삼아 다시는 악행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소식을 하고 고기의 맛을 멀리한다. 몸소 자신의 행동을 벌주고 따지고 물어서 천주께 합당케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자기의 사욕을 막고 도를 이루기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혈기를 제약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제약할 수는 없다. 우리는 육신을 통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사는 배의 허기를 해결하는 약이요, 물을 마심은 갈증을 해결하는 약일뿐이다. 종이 너무 건장하면 자기 주인에게 대항할 수 있듯이 육신이 너무 강하면 마음의 의지를 위태롭게 한다. 의지가 위태롭게 되면 곧 五慾이 발동하고 그 가운데 색욕이 가장 심하다. 따라서 올바른 선비들은 언제나 스스로 자기 마음을 잘 배워서 적절하게 몸을 통제하며 맑은 정신으로 영적 식별을 순탄케 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그런 선비들은 세상에 자신의 도를 널리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천주의 가톨릭  교회는 60세 이상의 노인, 20세 미만의 젊은이, 병약자, 아이에게 젖 물리는 여인, 체력을 쓰는 하인들은 모두 재계의 과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단지 입맛을 단속하는 것은 진정한 재계가 아니다.


제6편 의지는 소멸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아울러 사후에 반드시 천당과 지옥의 상벌로써 세인들이 행한 선악에 응보가 있음을 논함
中士曰: 천당과 지옥에 대하여, 사람들은 단지 천국에 가기위하여 선을 행하고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악행을 삼간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공리타산이며 교리의 바른 뜻이 아닌듯하다. 중국의 옛 성현들은 세상을 가르침에 ‘이로움’을 말하지 않았고 오직 仁義만을 설했는데 군자는 선을 행함에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다.
서사왈: “의를 없애라”라는 이론은 이단(불교나 도교)의 말(즉 공)이며 유교 선비들의 논의가 아니다. 유교의 학문은 성실한 의지가 없으면 설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마음을 바로잡음”으로부터“천하태평을 이룸”에 이르기까지 의지를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의지가 ‘진실된 지’, ‘허탄한지’ 따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의지란 형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고 마음의 쓰임새일 따름입니다. 마음을 써야 의지가 ‘그르게도’, ‘바르게도’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 덕과 부덕은 모두 의지의 ‘바름’과 ‘그름’에서 유래합니다.
의지가 없다면 선과 악이 없으며, 군자도 소인의 구별도 없다.


그러나 인위적인 의도를 하지 말라! 반드시 선하다고 고집하지 말라!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하지 말라!고 공자가 말씀하셨으니 유교는 진실로 그런 의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학문은 사람을 자유의지가 없는 돌멩이처럼 만들고자 할 뿐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의지도 없고 선도 없는 존재라면, 또한 그를 흙이나 돌같이 보는 것이다. 옛날 『노자』와 『장자』에는 의도적으로 “하지도 말고”, “논변하지도 말라!”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후대에는 경과 서를 저술하였고, 추종자들은 주석하였다. 저들이 일단 사태의 “옳고 그름이란 객관적으로 판별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또한 어찌 “옳고 그름을 변별”하는 논변을 하는 것입니까? 이는 결국 이론과 행동이 모순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일에 강력한 의지를 갖는다고 하여도 미치지 못할진데, 하물며 “의지를 없애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덕과 부덕, 선과 악, 모두가 사람의 의지로부터 연유함에 대한 보충설명
세상의 모든 사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그것에 의해서 선도 악도 나오고 덕과 부덕도 나오는 것이다. 짐승은 자유의지가 없이 본능으로 행동하니 그 행동에 선과 악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 대해 상과 벌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도리에 따라서 의지를 발동하면 덕을 행하는 군자가 되는 것이니, 천주께서는 그런 사람을 도우신다. 만약 우리의 의지가 금수심(禽獸心)에 빠진다면 죄짓는 소인이 되기에 하느님은 이들은 내치신다.


자식이 부모를 고양키 위해 남의 재물을 훔친다면...
누가 자기의 재물을 희사하여 다른 사람들의 가난과 궁핍을 구제하고, 그럼으로써 좋은 명성을 훔쳐내어, 평소 가질 수 없는 지위를 얻었다면, 비록 행동한 것이 마땅하다고 해도, 그 의지의 지향은 실로 삐뚤어진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공양키 위해 재물을 훔친다면, 그것자체가 이미 나쁜 것인데, 어찌 좋은 의지가 있을 수 있습니까?
바른 의지란 선행을 실천하는 근본이니, 오직 우리들의 올바름만 실천하고 우리들의 그릇됨은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내세의 이득을 헤아리는데 무엇 때문에 오지도 않은 미래를 염려하는가! 과연 무엇 때문에 내세를 논하겠는가!
옛날 서양에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걱정은 하지 말고 오로지 즐기기에만 힘을 써라”는 설을 세웠다. 참으로 현자라면 미래를 살핀다. 씨앗을 뿌렸다면 그 결실을 내다본다. 무능한 임금이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염려하는 것은 결코 우원한 것이 아니다.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이를 염려함이 우원하다면 그릇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남는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육신으로써 그는 즉시 썩어버리고, 남은 하나는 영혼인데 중국에서는 오직 죽은 육신을 위해서만 봉분을 하고 정성을 쏟으며 영혼은 소홀히 하는데 과연 어느 쪽이 우원(迂遠)한 것이겠습니까?


내세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또한 어찌 현세에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내세에서의 이로움과 해로움은 지극히 참되고 커서 이세상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예컨대, 사람들이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연극배우들이 극장에 있는 것과 같다.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다양한 배역을 맡아 한 때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한 배역, 높은 배역의 직분은 입었다 벗어버리면 그만인 옷이나 다름이 없으며 연극이 끝났을 때는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써 천주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다만 잘잘못을 가린다면 자신의 배역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했는가에 달려있다. 군자든 소인이든 알몸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난다. 하여 이세상의 재물이 다 무슨 소용이며 여기에 관심을 두어 근심한들 무슨 소용인가!
만약 이 세상에서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진짜로 여긴다면 이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고서 황제로 분장한 이를 진짜 귀인으로 여기고 노예로 분장한 이를 진짜 하인으로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릇 선행을 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의지’의 세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급은 천당에 오르고 지옥의 고통을 면하려는 의지이며 중급은 천주의 은덕을 두텁게 입은 것을 보답하려는 의지이다. 상급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화합하여 순명하려는 의지이다. 세상의 교화를 위해 책임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건강한 사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병자가 필요할 따름입니다. 가르침이 배우는 이들에게 바라는 바는, 그들이 배운 것을 이루어냄에 있을 따름이다. ‘이로움’의 추구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데는 ‘해로움’으로 겁을 주지 않고서는 선행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 일반적인 백성들은 덕행의 추구와 가르침보다는 받을 지옥 고통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렇게 유도한 후 점차 상급의 선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악한 사람이 악을 싫어하는 것은 형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고, 선한 사람이 악을 싫어하는 것은 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선비들이 천당 지옥설을 공격함은 이러한 이치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천당 지옥설이나 불교의 윤회설이나 백성들을 권면하기 위한 취지에서 같은 것이니 무엇이 다른가?
그들이 쓰는 허망한 무 존재는 잘못된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쓰는 ‘실재하는 존재’는 지극한 이치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인들의 윤회와 선인들의 극락왕생은 ‘이로움’만을 가르칠 뿐이나 천당 지옥설은 양자를 다 염려하기 때문이다.


선, 악에는 응보가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반드시 이 세상, 또는 자손에게 있다” 사후의 천당과 지옥을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현세의 보답은 미미하여 사람의 욕구를 다 채워주지 못하며 후손이 대신 받는다하여도 자식이 없어서 대가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 세상에서 덕의가치를 온전히 보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주께서 실재하시고 그분께서 공과를 판결하시는데 천주께서 해당되는 그 본인을 놔두고 후손에게 보답을 내린다고 하는 것은 이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천당의 유무에 대한 해명
지혜로운 이는 눈으로 보지 않고도 이치로 알 수 있다.
첫째, 사물은 모두 각자의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을 이루면 소망들은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현세에서 만족한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이 멈출 곳은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이 자명하다. 이 세상에 있지 않다면 내세의 천당에 있지 않겠습니까?
둘째, 사람이 바라는 바는 무궁무진한 진리를 알려는 것이요, 무제한으로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진리를 터득함에도 한계가 있고, 좋은 것에도 한량이 있는 것이다. 본성은 천주께서 주시는 것인데 그것이 현세에서 다 발휘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공연히 주시기만 한 것이겠습니까?
셋째, 덕은 이 세상에서 가격을 매길 수 없다. 천당으로써 그것을 보답하지 않는다며나,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받을 보상이 걸맞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죄질이 극악하면 그 죄과는 세상에서 극형을 내린다한들 다 해소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이 있지 않고서는 그 보응이 합당하다고 볼 수 없다.
넷째는, 천주께서는 응보에 사사로움이 없이 악한 자에게는 벌을 선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신다.


선자는 천당에 오르고 악자는 지옥에 간다면 그 중간인 자는 어디로...
천주의 경전에, “사람이 악을 고친 후에 혹 스스로 뉘우침이 깊거나 혹 그 몸을 고통스럽게 하여 스스로 징계함으로써 전주의 용서하심을 구하면, 천주께서는 반드시 또한 이를 용서하실 것이니, 죽은 후 즉시 하늘에 오를 수 있다. 만약 뉘우침이 깊지 않고 스스로 고통스럽게 함이 ‘앞서 지은 죄’에 미흡하다면, 지옥 안에 이런 사람들을 두는 다른 한 곳 즉 연옥이 있다” 신묘한 도를 깨우친 중국의 현자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계심을 알지 못하고 또는 믿지 않고서 하는 설은 모두 불완전한 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의 응보는 불교와 도교에서도 설하고 있으며 천주의 성경에도 그 명백한 理致가 실려 있다. 그러나 실재 천당과 지옥의 상과 벌은 차마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제7편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을 논하고 천주교인의 올바른 배움을 서술함
中士曰: 유가에는, 하늘로부터 받은 완전한 본성에 따름을 수도로 보고 있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다 선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따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구나 다 좋은 본성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본성 또한 진실로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니, 어쩌면 좋겠는가?
西士曰: 제가 보기에 유가는, 사물의 이치는 알지만 인간 목신의 근본은 알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철학자는 이렇게 정의했다.“그것은 바로 살아 있으면서 지각하는 존재이며, 이치를 추론할 수 있다” 살아있기 때문에 금석과 다르고, 지각하기 때문에 초목과 다르다고 한다. 이치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짐승과도 다르다고 한다. ‘추론 한다’고 말하지 ‘명백히 이해하고 있음’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또한 귀신과 구분된다. ‘이치를 추론할 수 있음’이 인간을 본래 자기의 부류로 만들어주고 사람이라는 개체를 다른 개체들과 구별해 주니,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해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본성의 바름을 얻었지만 짐승들은 본성의 편벽됨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라면 ‘완전한 것“ 자체이지 편벽됨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나의 본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랑이나 미움을 받을 만하게 되는 것이다. 본성 그 자체는 선가 악이 결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이미 선하다고 한다면, 이 악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사람의 본성은 선도 악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성 자체에 악이 있지는 않다. 천주께서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을 행하게 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간의 공로로 만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성에는 덕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면 어찌 선할 수 있는가? 이른바 군자란 그 원초에로 되돌아감을 말하는데...
원초에로 되돌아감이 선이라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다. 덕이라는 것은 습성인데 이것을 버리고 원초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면 생전에 쌓은 공덕과 공과를 어떻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공로란 다만 인간들 스스로 배워서 쌓아올리는 선에 있다.
동물이나 사람은 본래 양선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은 이 공덕을 쌓아 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이미 선하다고 한다면, 이 악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사람의 본성은 선도 악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성 자체에 악이 있지는 않다. 천주께서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을 행하게 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간의 공로로 만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면 본성을 더럽히는 것이요 의를 행하는 것은 본성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세속의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것에 마음을 두어 진실된 보배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천주께서 인간을 세상에 내신 것은 공덕을 쌓아 무궁한 복락을 얻게 하심인데 세상 복락만을 추구하니 이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소망하는 것을 찾고 얻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수덕(修德)의 길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나아가기가 힘든 것입니까?
모두가 어렵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의 허물은 배로 늘어나고 그의 지식도 감소된다.


중국의 현자들은 올바른 ‘배움의 방법’을 설하지만 성인은 없다. 올바르게 배우는 방법은?
서양의 현자들은 학문을 논함에 각자 자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보편타당한 학문은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서책들의 부족이나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는다. 천지 만물이 모두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고 책들이다. 배움은 오직 ‘내면’이요 자기완성을 위한 것이다. 유형한 육신은 오관을 가지고 감성자료들을(images) 정신에 전달해 주고, 무형한 정신은 세 가지 기능 즉 기억(memory)창고에 저장, 이성능력 즉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기존의 기억을 더듬어 대조 분석해보아서 올바른 인식을 돕게 하고, 의지력 즉 이성의 심판을 받은 대상의 선함과 악함에 대하여 이를 행하게 한다. 이성은 ‘참’을 좋아하고 의지는 ‘좋아함’을 높이 본다. 이성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며 의지는 인을 실천하여 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은 ‘의’의 최고 핵심이다. 인이 지극하면 이성의 활동은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성의 헤아림보다 먼저 하나의 중심된 의도를 세우고 이를 향해 전력한다. 이것은 마치 행선지가 정해져야 길을 떠날 수 있는 여행자와 같다. 이성은 그 길을 떠나는 과정에 있어 유용한 것이다.
저는 학문의 높은 뜻은 오직 자기를 완성함으로써 ‘거룩한 뜻’에 합일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이른바 성기(成己)로 말미암아 성지(聖旨)로 귀의한다는 말이다. 인이란 천주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 근원을 흠숭하는 것에 있다. ‘성인으로 되게 하는 학문’은 우리 인간 본성 안에 있으니 ‘천명을 터득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터득하고, 성인들로부터 배움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악습을 잘라내고 몸소 실천하는 것에 있다. 천주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니 진실로 천주를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점이 바로 ‘인’의 덕이 존중되는 까닭이다. 자아의 완성은 인간들 내면에 관련된 것들이니, 다만 사랑하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마음의 이끌림만으로 천주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사람이 도를 아는 것은 누구에게서 배워서도 아니고 인간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는데 배우지 않아도 그것을 행한다. 또한 이 믿음에는 더욱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천주께서 내려주신 ‘바른 경전’이 있고 선교사들은 세상에 이것을 전하여 왔다. 세상의 영재들이 이를 따르고 믿고 있으며 단순히 직관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오륜에 드는 사람은 비록 그가 악하더라도 사랑하며, 들지 않는 자라면 굳이 사랑하지 않는데...
진정한 사랑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다.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소인배들과 다름이 없다. 우리가 악자도 사랑해야하는 이유는, 그자도 천주의 자녀이며 우리들의 사랑으로 마음을 고쳐 교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의 가르침은 한정되고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 가르침(사랑)이기 때문이다.


천주를 공경치 않고 불상에 예배하고 불경을 읽는 것은 무익하며 바른 도리를 해치는 것이다. 그렇게 할수록 죄만 가중될 뿐이다. 한 집안에 한 어른을 둘로 가름은 불경이 되는 것이다.


천자가 궁중 안에 있으면서 온 나라에 관리를 파견하는 것처럼 천주께서도 세계 각처에 부처, 신선, 보살들에게 위탁하여 지역을 보호하고 튼튼하게 하는지, 천주 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
천주께서는 무궁하시고 전능하시니 현세의 천자처럼 관리를 파견하지 않으신다. 또한 교리에도 다 옳을 수 없고 한교리가 성하면 다른 교리와 대적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의 바른 교리만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거짓 경전들이 수없이 많고 그 설은 또한 공허할 뿐이다. 윤회니 육도니 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적합하지 않다.


우상 숭배에 관하여
인간은 나약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신묘한 일을 경험하면 그것을 기억하고자 상을 세우고 또 거기에다 절을 하고 복을 빌기도 한다. 또 이것을 이용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현혹하기도 하는 자도 있다. 불상에 절하여 복을 이루었다고 여겨지는 것들조차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죄를 짓게 되면, 천주의 은총에서 멀어지므로 귀신과 마귀들이 우상에 흘러들어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삿된 신을 받들게 되면 사후 인간은 지옥에 떨어져 마귀의 부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마귀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혼미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황금을 칠한 자리에 안치하고 제사지내니 슬픈 일이다.
유교, 불교, 도교를 하나로 합쳐보아 생각해보면, 누가 그 중에서 하나를 지키고자 한다면 진실로 다른 것을 어기게 되고, 또 하나를 지키고자 한다면 다른 하나를 어기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삼함교(三函敎)야말로 어찌 교리를 어지럽히는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도리와 진리가 꼭 맞아 떨어지면 어느 믿음이든 영화롭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뿌리가 깊지 않으면 바른 도리가 나올 수 없으며 그런 배움은 무용할 수밖에 없다.


제8편 서양 풍속이 숭상하는 바를 일괄하여 말하고, 서양의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는 까닭의 의미를 논하며, 아울러 천주께서 서양에서 강생하신 이유를 해석함
서양인들의 천주공경
서양의 여러 나라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도리를 배우는 것을 기본 업무로 한다. 가장 존귀한 직위로는 교황이 있어, 자신의 직분으로 천주의 교리를 세상에 알리고 이단과 싸운다. 이분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서 힘 쓸 수 있으며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쉬게 한다. 이 날은 남녀, 귀천 불문하고 모두 성전에 모여 예배와 미사에 참여하고 말씀을 듣는다. 각 수도회가 있어 학문과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봉헌자들은 종신토록 색욕을 끊는다는데 의미는...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니므로 강제하지 않고 다만 원하는 자에 한에서 그렇다. 올바른 선비라면 덕을 닦는데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일을 내일처럼 여긴다면, 비록 생명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 인류가 하나의 지체라고 했을 때 각 지체들은 나름의 기능을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어떤 이는 통치자가 되어 나라를 운영하고 또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맑고 금욕하여 깨끗한 마음과 정신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또한 선교사들은 만민의 교화를 위해 결혼하지 않고 온 세계를 유랑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런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결혼이 선과 도리를 전하는데 굳이 장애가 되는가?
일단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남녀의 가족의 결합이요, 또 자식을 낳아 길러야 하고, 그러다보면 재물도 필요하게 되죠. 그렇게 된다면 세상일 보다는 개인적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둘째, 색욕에 따라 행동하면 사람은 혼미와 몽매에서 벗어나기 힘드니 바른 교리를 전하기가 곤란하겠죠, 그렇다면 이 두 요소를 끊지 않고 어찌 백성들에게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세속 삶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경청하고자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수도자들은 색과 재물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하여 가난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은 천하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또한 명민하고 영특한 인재가 있으면 이를 잘 훈련시키기 위해 특별히 보호하여 세상에 나아가 많은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서양의 선비들은 자손을 낳는 것보다 도리를 전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여깁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가족과 떨어질 수 없으니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겠죠! 이들은 색욕을 끊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주께서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중국에서는, 후손이 없는 것이 세 가지 불효 중 하나인데...
중국 선현들의 그런 교설은 비논리적이고 거짓이다. 만일 30 이후에 후손을 보았다면 그 전에는 불효한 것인가? 효를 했느냐, 안했느냐는 외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자식을 얻고 못 얻음은 천주의 정하신 운명이 있습니다. 자식을 얻고자 하는데도 얻지 못하는 운명이라면 그것이 어찌 불효인가! 세상에는 생물학적 부모도 있지만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도 계십니다. 만일 현세적 부모에게만 효도하고 재물과 후손을 통해 공양하고, 진정 우리의 부모이신 하느님께 대한 효도를 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것이 올바른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당대의 현인들이 학문을 논하지만 그 겉만 따지기에 급급하고 속을 궁구하지 않으니 지금이야말로 난세 중의 난세이다.
유가의 문인들 중에 간혹, 자기의 사사로운 지혜를 믿고서 내세를 논하면서 ‘올바른 비움’을 점점 더 어지럽히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모든 존재사물에 하나의 시원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근원으로 귀의해야함을 안다면 사람이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분이 만유 위에 높으신 분이라면 어찌 세상 사람들을 아둔하고 어두운 곳에 있게 하며, 만물의 근원인 큰 아버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망연하게 있음을 보고 내려와서 당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참고 계시기만 하는가?
천지창조의 맨 처음에 태어난 사람들은 질병과 요절이 없었고 늘 평화로웠다. 천주께서 모든 동 식물들에게 명하여 사람을 따르고 침해하지 못하게 하셨다.
어지러움이나 재난은 사람이 도리를 어기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서 비롯합니다.
인류의 조상이 이미 인간됨을 망쳐놨으니 그 후손들도 고통과 결함을 겪는 것이다. 본성 자체는 선한 것이며 나중에 배운 것은 습성일 따름이다.
이런 모순이 계속되자 천주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인해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가 예수이며, 예수란 온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33년 동안 서양에서 널리 교화하고 승천하였으니 이것이 천주의 실제 생적입니다. 그는 예사 성인들과 달리 품행에 있어 보통 사람을 초월하였습니다. 예컨대 병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도구 없이 기적을 행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도 하셨으며 사후의 일들을 염려하고 설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반드시 천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에 서양의 성현들은 그분의 오심을 예언하였는데 실제로 이루어졌고 네 분의 성인이 그분의 행정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을 온 세상 무리가 따랐습니다.
한나라의 명제는 일찍이 그 사실을 듣고서 사신을 파견하여 서양으로부터 책을 구해오라고 시켰으나 중도에 사신이 불경을 가져와 잘못 전하여진 것이다.


성교회 입문은 어떻게...
성교회에 입문하는 데는 성세성사가 있다. 세례를 받으면 과거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된다. 이렇게 하여 모두가 한 어버이를 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천주 성경의 문자는 중국의 문자와 다르다. 비록 성경의 번역이 다 되지 못했으나, 그 요지는 이미 중국 문자로 다 옮겨놓았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그리스도교 교의의 실마리이며 요점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이해되고 의혹이 없게 되면 성세를 받아 입교가 가능하다.

 


中士: 서양 풍속이 숭상하는 바는 무엇인가?
西士: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그리스도교의 도리를 배우는 것을 기본 업무로 삼는다.
가장 존귀한 직위를 세워서 "교화황"(敎化皇: 교황)이라 하고 교황은 천주를 계승하여 가르침을 반포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을 자기 직분으로 삼는다. 교황은 결혼하지 않아 후사가 없기에 오직 현명한 사람을 선택하여 세운다. 사사로운 가족이 없으므로 오직 공적인 일에만 힘쓴다. 남녀존비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모두 성전에 모여 종일토록 예배와 미사에 참여하고 도리에 대한 말씀과 성경 해설을 듣는다.
中士: 상제의 본성은 생명을 낳는 것이 근본인데 종신토록 색욕을 끊고 평생 결혼하지 않는 계율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西士: 색욕을 끊는 것을 계율로 반포하여 사람들이 다 지키도록 강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지키게 할 뿐이다. 온 세상 사람들을 통틀어 말한다면 하나의 몸 전체와 같다. 각자의 역할을 있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 동일한 궤도를 따르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리고 나라의 군주를 받들어 섬기는 데에도 인내가 필요한데, 하느님을 받들어 섬기는데 자기 욕심을 극기하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은가. 이에 세상을 구원하는 데 뜻이 있는 어떤 사람이, 오늘날의 세상 사정을 깊이 슬퍼하여 수도회 규칙을 정하여 색욕을 끊고 결혼하지 않도록 하였다.
中士: 결혼하는 것이 선을 권하고 도리를 전파하는 데 무슨 탈이 되는가?
西士: 탈 될 것은 없지만 홀몸으로 결혼하지 않으면 더욱 더 안정된 마음으로 자기 인격을 완성하여 '편리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편리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결혼하면 부모가 되고 부모가 되면 재산을 늘리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을 분발시키기도 어렵고 덕을 닦기도 어렵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그러한 문제가 없다.
2. 색욕은 사람을 둔하게 하는데 색욕을 끊어 버린 사람은 마치 마음의 눈에 낀 먼지를 제거하여 광명을 더욱 더 보태준 것과 같아 도리와 덕성의 정밀하고 미세한 것까지 궁구할 수 있다.
3. 그래서 재물욕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고, 색욕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독신자로 지낸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의롭지 못한 부를 추구하지 말도록 권면하고 색정에 미혹되지 말도록 권면한다.
4. 재물욕과 색욕은 마음을 흩어지게 하여 교화 작업에 전념하는 데 방해가 된다.
5. 천주의 성스러운 가르침의 올바름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서양 선비들은 마음을 집중하여 도리를 계승하는 일을 후손을 잇는 데 힘쓰는 일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6. 본능에 의해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것은 동물도 하는 하등의 것이다. 의를 따라 마음을 점검하고 수신하여 사랑의 마음을 확충하여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하느님의 큰 뜻이다. 세상에 먹을 것이 없을지언정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도리를 반포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포기하는 것쯤이야 문제되지 않는다.
7. 결혼한 몸은 한 곳에 얽매어 있으니 그의 본래 책임은 가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지 못하거나 한 나라에까지만 미칠 뿐이다. 그러나 수도회의 동료들은 하느님의 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세계 각지까지 가고 하느님을 부모로 하고 세상 사람들을 형제로 하며 온 세상을 자기 집으로 삼는다.
8. 천신들이 색욕을 모른다면 색욕을 끊은 사람의 실제 모습은 천신과 가깝다. 이들과 같이 청정한 인물들이 천주께 기도하면 대부분 다 살펴보시고 들어 주신다.
대개 순리대로 부인을 맞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이들이 모두 신과 같은 사람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올바른 여자를 거부하고 비뚤어진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여색을 버리고 소년을 취하는 것)
中士: 중국에서는 후손이 없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여기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西士: 그 말은 맹자의 말이지 성인이 전한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은 맹자에 와서야 나온 말이고 백이, 숙제, 비간은 모두 후손이 없었는데 공자는 그들을 어질다고 여겼다. 그리고 남자는 스무 살 이상이면 자식을 낳을 수 있는데 순임금은 서른 살에 부인을 맞이하였으니 10년 동안 효도를 못한 것인가?
서양의 성인들은 극단적인 불효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부모를 죄악에 빠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를 살해하는 것이고 셋째는 부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 父子는 무엇이고 孝는 무엇인가? 사람은 세상에 세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 천주, 군주, 가장이 그것이다. 낮은 아버지를 따르며 높은 아버지를 거역하면 진실로 크게 불효하는 사람이다. 만일 하느님이 만인의 아버지인 점에 비하면 비록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 있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평등하게 형제가 될 뿐이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받들며, 만세 뒤라도 언제나 하느님을 받들고 섬기기를 바란다면 어찌 후대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우리는 죽어도 정신의 통찰력(神明)은 온전히 존재하며 더욱 더 선명하고 빛날 것이다.
中士: 오늘날과 같이 태평한 세상에서 선비가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찌 나쁜가?
西士: 지금이 태평한 세상인가? 아니다. 지금은 요임금 시대보다 재난이 더 크다. 불교나 도교의 우상을 숭배하여 사람들이 부정해지고 천주의 종적을 없애 버리고 그 지위를 참월한다. 위대한 우임금이 오늘 세상에 있다면 반드시 가정을 갖지 않고 종신토록 많은 나라를 두루 돌며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中士: 천주가 세상 사람들의 어진 아버지라면 어찌하여 인간들을 오랫동안 어리석고 어두운 가운데 있게 하며 봄원인 큰 아버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길거리에서 어릿어릿 망연하게 있음을 참고 있기만 하는가. 어찌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와서 친히 미혹된 무리들을 인도하지 않는가?
西士: 천주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과 만물을 창생하시기 시작했을 때에는 세상이 지금같이 어지럽고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런 어지러움이나 재난은 모두 사람이 도리를 어기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이미 하느님을 배반하였으니 만물 역시 사람을 배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자초했기에 온갖 불행이 생겨났다. 세상 인류의 조상이 인류의 본성의 뿌리를 이미 망쳐 놓았으므로 그 자손된 자들은 그 물려받은 잘못에 따라 본성의 온전함을 계승할 수 없었고 결함을 지닌 것이다. 천주께서는 아버지로서 백성들을 자애하고 불쌍히 여기시어 옛날부터 대대로 성신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사람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이들을 위해 법도를 세우셨다. 순박함이 점차 흩어지고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날로 많아지고 도리를 따르는 사람은 날로 드물어지게 되었다. 이에 하느님께서 동정녀를 어머니로 택하여 교감 없이 잉태되었고 강생하셨다. 이름을 예수라 하고 몸소 자신의 가르침을 세우고 33년 동안 서양에서 널리 교화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中士: 당시 사람은 예수가 천주이며 단지 사람이 아님을 어떻게 징험하였나?
西士: 사람을 성인으로 일컫기로는 서양의 법이 중국에 비해 더욱 엄격하다.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을 부지런히 흠숭하며 겸손하게 스스로를 다스리는 자이다. 그러나 그 말하는 바나 행하는 바는 사람들을 뛰어넘어 모두가 사람의 힘으로는 반드시 미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성인이 흠숭하는 하느님은 어떻겠는가.
中士: 사람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西士: 하느님의 일이나 사후의 일, 미래의 일들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런 도리를 전수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안된다. 오직 천주께서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다. 성인의 뛰어남은 천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서양의 성인들은 하느님의 강생을 예언하였고, 하느님의 행적은 예언과 부합했다. 이로부터 서양의 여러 나라에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明帝 때 그 사실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서양으로 가서 성경을 구해 오라고 했는데, 사신이 중도에 잘못하여 인도에 도달하였고 불경을 가져와 중국에 전파했다. 그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속임을 당하여 온 것이다.
中士: 그 시대를 살펴보면 일치하고 인물을 따져보면 통하고 일어난 일들을 고찰해 보면 의심이 없다. 나도 집에 가서 목욕하고 하느님의 참된 경전을 받들어 선비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교회에 입문하고자 한다. 이 성교회 이외는 이 세상에서 올바른 도리를 얻을 수 없고, 내세에는 하늘의 복락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일 명백히 알겠다.
西士: 모두 같은 아버지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도는 사람의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세상의 잘못을 불쌍히 여겨 원래의 길로 되돌리고, 이들을 위해 한결같이 천주의 성스러운 교회에로 인도하여 채우려는 것이다.(동서양의 교육에 대한 개념, 스승관) 구차하게 스승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스승을 욕되게 하는 예식을 하겠는가. 성경을 아직 다 번역하진 못했으나 그 요지는 이미 한문으로 옮겨 놓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그리스도교 교의의 실마리이자 요점이다. 이런 것을 이해한다면 성세를 받아 입교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中士: 우리의 몸은 천주로부터 나왔는데도 오랫동안 천주의 도리에 어두웠다. 천주께서 선생을 도와 중국 곳곳에 천주의 교리를 현양하고 모두 선을 닦아 악이 없는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프리스트
프리스트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방황한 당신의 영혼이 안락할 수 있는 곳. 여러분을 글의 세계로 안내하겠습니다. 신의 은총이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