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전-범초 홍성렬 교수님 약력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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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나무 작성일13-12-12 21:19 조회6,378회 댓글0건본문
1. 충남 목천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
--충남 천안군 목천면 신계리(현 독립기념관부지)7의 3번지에서 출생
--농사짓는 부친 洪万杓, 모친 金洪玉씨의 5남 1녀중 4남
--을해(1935)년 3월 15일(음력 2월 11일) 생
--본관 남양, 본명 性烈, 자 農溪 호 凡草
2. 착한 성품에 시를 좋아한 소년시절
--양순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고 형제간에 다툰 일이 없는 착한 성품, 내성적이어서 말수가 적고 독서하기를 좋아함
--학업이 우수하여 목천국민하교 3학년때에 4학년으로 월반
--4학년때 학교 문예지에 ‘고을’이라는 동여를 내어 유명한 시인 박윤선생의 칭찬을 받음, 이 해 가을에 천안군청에서 세금에 관한 어린이 문예작품을 모아 시상할 때 입선 이후 시인이 되려는 꿈을 가지다
--1949년 3월 천안중학에 입학, 이해 가을 부모를 따라 증산교에 입교 봉청수(奉淸水) 하고 기도, 송주(誦呪)하는 증산교의 신행(信行)을 시작
3. 흙내음 속에 살아온 고교시절과 독립의지 다졌던 대학시절
--1952년 4월 1일 천안농고 원예과에 입학 점심도시락에 비지가 섞일정도로 빈한, 학교에서 과수가지 자르고 똥통지는 일 익히며 집에서는 지게질 잘하는 학생으로 동리에 소문이 남
--고3때 모친의 급작스러운 별세로 충격을 받고 2학기를 번민속에 지내다 병을 얻어 고생
--55년 4월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교) 수학과에 입학, 집안을 돕고 학비조달을 위해 공주시장에서 작은 점포를 얻어 3년간 운영, 세상 물정 체험하며 독립의지를 다짐
4. 작은 일에도 정성들이며 살아온 교육자의 삶
--1959년 11월 대학졸업후 모교 천안농고 교사에 임함
--1961년 3월 군입대 교사병역특례법에 의해 1년후 제대
--1961년 5월 면천농고 교사에 임함
--1962년 2월 예산농고 교사에 임함
--1967년 4월 예산농전 교수에 임함
--1981 2월 이학석사(건국대학교 대학원) 받음
--1081년 3월 예산농전 학교신문주간에 임함
--1990년 4월 예산농전 도서관장에 임함
--1992년 7월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 교수에 임함
5. 끊임없는 저술과 증산종단 창명운동에 헌신
--33세(1967) 5월 증산교리 100문 100답 간행
--35세(1969) 6월 예산자택에 22평의 교당 건립
--36세(1970) 12월 증산신도친목회 창립에 참여
--37세(1971) 3월 증산종단개론 간행
--37세(1971) 5월 증산종단 각교단을 순방 슬라이드 500매 제작
--38세(1972) 12월 증산교 제3대 종령에 피선
--39세(1973) 3월 수부론 간행
--40세(1974) 3월 증산사상연구회 창립에 참여 초대간사
--41세(1975) 1월 증산종단연합회 창립에 참여
--43세(1977) 1월 증산교단공통교리 성안을 위한 공청회 개최
--45세(1979) 12월 증산교 제5대 종렬에 피선
--48세(1982) 7월 증산교 개설 간행
--51세(1985) 5월 범증산교연구원 개설
--55세(1988) 2월 범증산교사 간행
--55세(1988) 10월 월간 천지공사 발간, 10여년 넘게 발간함
--56세(1989) 12월 증산교 11대 종령에 피선
--58세(1992) 8월 증산종단의 새 기틀을 여는 공청회 개최
--60세(1994) 11월 증산종단연합회 추계총회에서 회장에 피선
--61세(1995) 3월 회갑기념 시문집 ‘상생의 도를 생각하며’ 발간
7. 한국민족종교간의 교류 증진과 발전에 기여
--1981년 8월 29일 민족종교종교인친목회 창립에 참석
--1985년 11월 16일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창립에 참여
--1987년 3월 1일 한국민족종교협의회에서 ‘삼일운동과 민족종교’라는 논제로 강연
--1987년 6월 24일 한국민족종교 학술발표회의에서 ‘증산교에서 본 한민족의 진리와 과제’라는 논제로 강연
--1989년 12월 22일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부회장
--1993년 12월 16일 제8차 민족종교지도자 대회에서 ‘사회개혁과 민족종교의 역할’이라는 논제로 강연
--1994년 11월 29일 제9차 민족종교지도자 대회에서 ‘민족종교의 도덕관으로 난국수습할수 있다’라는 논제로 강연
--2001년 10월 25일 모 교단 신도들에 의해 피살되어 순교하심(옮긴이 작성)
가족관계
사모님 鄭 分 여사님 사이에서 1녀 2남
댓글목록
조화봉님의 댓글
조화봉 13-09-20 20:02 댓글상단평소 궁금하던 홍교수님 약력을
잘 정리하여 올려주셨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드려요
맑은바람님의 댓글
맑은바람 13-09-20 20:22 댓글상단고수부님 말씀에
초막에서 성현이 나온다(선정원경) 는 말씀이 있고,
상제님 말씀에
초가집에서 성인이 나오느니라(이중성 천지개벽경)
말씀이 있습니다.
똥통짓는 일을 하며 지게질을 잘하셨다고 하니
홍교수님의 어린시절 고단했던 삶을 그려봅니다.
어릴적 기백석 추수하는 부유한 집안 아들로 태어나서
가장좋은 양복을 해입고
가장좋은 구두를 해신고
일제에서 들여온 자전거를 탔으며
금색으로 번쩍이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등
어린시절 온갖 호사를 부렸다고 하는
모 교단 어떤 분과는 완전 다르네요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홍교수님 약력을 읽으며
문득 위의 성구들이 떠오릅니다.
부자집 아들이 어찌 상제님 참교단의 교주가 되겠습니까?
물론 될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집 아들이건 부자집 아들이건
참을 밝히고 신앙한다는데 근본적인 차별은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대비되는 두분의 인생항로를 보십시요.
한분은 그 교단 신도들이 반대파라고 상대방을 참혹히 죽였고
또 한분은 참을 밝히다가 오히려 맞아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홍교수님이 성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홍교수님은 비록 불우하게 돌아가셧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노들님의 댓글
노들 13-09-20 22:03 댓글상단민족종교.... 참으로 눈에 익네요.
뿌리가 드러나는 세상 같습니다.
복록신님의 댓글
복록신 13-09-20 23:14 댓글상단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가장진짜같은 사이비 시한부개벽으로 신도들을 내몰아 참담한 현실로가정파탄을
일으키고 몰인정하고 야비한 일련의여러 사태를 야기시킨 모단체의 교주나 추종
하는 신도들 의 행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알며 천지신명이 아는겁니다.
가벼운처사가아닌 자신의 몰인정 야비한 행실은 현실에투영되 원원한상태로
남아 본인이씨뿌린데로 천지에서 준엄한 심판이 이루어 질것입니다
호생지덕님의 댓글
호생지덕 13-09-20 23:58 댓글상단유방백세流芳百世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고,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오래도록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한평생은 불과 60~70년을 전후하여 결정되는게 아닌가 해요. 비록 70을 넘기고 오래 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인생에서 새로운 것을 추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평가는 100년이나 200년만 가는게 아니라 그 업적과 행위의 경중에 따라 천년도 가고 만년도 갈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사람은 비록 짧은 한세월이지만 눈앞의 이익이나 개인적인 사리만을 추구하여 살것이 아니요, 대의명분과 공익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누군들 편한것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견리사의見利思義라--눈앞의 이익을 보고든 의리를 먼저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홍교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맞서 싸우신 분입니다. 저도 홍교수님같은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홍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아라사군사님의 댓글
아라사군사 13-09-21 00:01 댓글상단약력부터가 대두목놀이, 황족놀이, 금전갈취에 미친 어떤 단체 어떤 교주와는 그 시작부터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초막에서 성인이 나오리라." 는 말씀 그대로 입니다.
고인의 일편단심의 생애는 우리가 늘 새기며 본받아야 합니다.
풍류주님의 댓글
풍류주 13-09-21 12:54 댓글상단나는 언제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쪽이다. 일방적인 몰아부치기나 편가르기는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운산과 범초의 삶을 어떻게 볼것인가가 나의 신앙에서 화두였다고 고백한다.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관심사이다. 운산은 1922년생이고 범초는 1935년생이다. 두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결국 2001년에 이르러 한사람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한 사람도 2012년에 이르러 많은 나이와 병으로 병사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운산이 용화동에 간것은 1945년 그의 나이 24살때였다. 거기갈때 그는 부자집 자제였으며, 돈에 구애를 받지않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는 50대 초반과 60대로 진입하려는 돈업고 빈티나는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있었다. 그는 거기서 그분들과 동지적 입장에서 손을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 십수만을 포교했으며, 이상호 이정립 선생의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불의한 두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해서 그곳을 나왔다고 했다.
1951년 의통준비를 할때도 자신이 중심이 되서 의통을 만들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포교한 숫자가 많고 거기서 의통에 필요한 경면주사를 조달했다고 했다. 경면주사는 살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일제시대 수부님을 모신적이 있다. 수부님은 1933년 오성산으로 떠나시면서 상호 정립 형제에게 용봉기를 그려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수부님은 이 담에 사람이 난다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그 사람이란게 운산과 경전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나는 운산과 경전이란 분의 삶과 업적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분들이 상제님 신앙 100년 역사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비록 한분은 돌아가셨지만 한분은 살아계시며 아직도 큰 단체를 이끌고 있다. 두 분은 나름대로 교운사에 큰 공을 세우신 분들이라고 본다.
나는 과거에 그 교단에서 책임자 생활도 하고, 온갖 충성을 바쳤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분들의 시각과 주장대로 본다면 그분들 말씀이 맞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석연찮은 것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나의 고민은 진행중이다.
1945년 해방되고 운산이 용화동을 찾아가서 동지적 입장에서 일을 했으며, 청음과 남주의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십수만 되는 사람을 포교했다고 하자. 청음 남주는 이미 늙었고, 자신은 젊었기 때문에 자신이 주역이 되서 증산교도 만들고 새기운을 돌렸다고 하자. 또한 청음 남주 두 늙은 분이 불의하게도 젊고 유능한 자신을 쫓아냈다고 하자. 그리고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하자. 다 인정해 본다. 청음 남주가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역시 보통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상제님이 역시 한때의 역할을 주어 쓰신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청음 남주 두 형제분도 서로 신경전을 벌었으며, 주도권 다툼을 했을 것이라 본다. 아주 의좋은 형제였다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80년대 이후 운산이 만든 새로운 교단은 과연 의롭고 참다운 교단이었는가? 이 문제는 해방후 용화동 교단 문제와는 또 별개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해방직후 소위 용화동교단의 문제는 운산의 말대로 그렇다 치더라도, 80년대 이후 소위 대전 교단의 운영은 청음 남주와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던가? 그러면 그 교단운영이, 진리체계가 상제님 본래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제대로 보고, 재정립하기 위하여 오늘도 살아 숨쉬고 있다.
아라사군사님의 댓글
아라사군사 13-09-21 20:55 댓글상단to 풍류주 ↑ 모 종단 교주는 말하기를 자신의 연원은 이치복 성도라고 했죠. 청음, 남주는 자신의 동지적 입장일 뿐이라고요.
그러면 청음 이상호 선생 이름을 걸고 포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의통도 청음 이상호 선생이 아닌 이치복 성도로부터 받았어야 합니다.
청음, 남주 두 선생이 모 교주 말대로 그토록 불의한 사람이라면 모 종단 교주는 그 때 제작된 청음, 남주로부터 전하여 제작한 그 '불의한 집단'의 의통도 다 폐기하고 제작법도 깨끗이 잊고 절대로 다시 제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상제님께서 박공우 성도 통해 이상호에 의통을 전한 것이 '불의한 인물'에게 의통을 전한 것이라면 상제님께서는 완전히 넌센스 천지공사를 보신 거죠.) 또한 대순전경, 대순철학, 범증산교사 같은 그 '불의한' 이상호 교단에서 출간된 책도 자신의 교단 책 만드는데 무단 발췌해서는 안돼겠죠. 그것이 정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라사군사님의 댓글
아라사군사 13-09-21 21:31 댓글상단"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고 맞이해야 하느니라."
'일후에 나오는 사람' 그 분은 누구인지 저는 상상해봤습니다.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모 교단의 모 교주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의 초석을 쌓으시는 분.
상제님 수부님 그리고 성도들이 세운 각 교단의 행적을 글로서 종합하여 증산신앙단체의 올바른, 진정한 통합을 이끌려 했던 분.
고 홍범초 교수님 아녔는가 말이죠.
그분은 용봉기가 증산대법사(현 증산교)에 있었던 기간(1947~1958)인 1949년 부친을 따라 증산교에 입교하여 신앙을 했습니다. 청음, 남주 두분이 돌아가신 후 증산교에서 수 차례 종령을 역임하셨습니다. 또한 편찬사업을 통해 불후의 역작 <범증산교사>를 남기시고 어떤 흉악한 무리들에게 해를 입으시고 순교하셨습니다.
물론 다양한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그분이 평생에 걸쳐 순결한 마음으로 상제님 천하사를 했던 바로 '일후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 분의 고결한 신앙의 발자취가 더없이 느껴지는 가을입니다.
덕산님의 댓글
덕산 13-09-23 19:20 댓글상단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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