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호롱불(펌)_다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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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3-12-09 14:26 조회7,460회 댓글1건본문
제가 아는 신앙이란 두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진리적 신앙입니다.
두 번째는 체험적 신앙입니다.
첫 번째 진리적 신앙은 많은 분들이 여기 증산 참신앙에
글로서 참된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번쩨 체험적 신앙이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신앙입니다.
저 역시 상제님 도문에 들어온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수행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수행단체의 게시판을 보면 활발히 수행에 대하여 자신들의 경험과
토론하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상제님 도문의 단체를 보면 수행의 방법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말한 단체가 없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상제님 도문에서 그동안 방황했던 이유기도 하였습니다.
상제님의 진리를 좋으나 주문 수행은 기존 단전호흡이라고 불리는 호흡 수련에
비하여 체계적인 것이 전혀 없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상제님 진리를 설명하는 책은 너무도 많으나 수행의 방법론에 대하여 한 권도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주관적인 체험일지라도 이를 밝혀서 논하고,
또 상제님 진리에 도움이 될 자료를 발굴하고 취합한다면,
훌륭한 수행지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소개하는 유체이탈에 관한 자료는 너무나 유명한 자료라서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전혀 생소하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기존에 읽어보았던 분이라도 다시 읽어 보면 새로운 개달음을 발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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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의 출처는 본래 호롱불라는 글의 게시글인데 그 분은 원본이 되는
최초의 글을 삭제된 상태로 보입니다.
호롱불이라는 분은 유체이탈로 유명한 분으로서 일천 번 정도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활동을 접었는지 웹상에서 그 분의 글을 더이상 볼 수 없습니다.
유체이탈의 실상과 실행
책머리에...
내 생각과 경험을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망설이다가 수년의 세월이 또 흘러갔다.
나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들이 순간순간 발목을 잡곤 했다.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분들 중에는
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함구하고 있는데,
내 주제에 뭔가 안다고 떠드는 것이 참으로 송구스런 일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주제넘기도 하고...그래서 더더욱 망설였고, 늦어졌다.
내가 하고자하는 일은,
결국 나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족함을 알면서도 필을 들었다.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깨우치지 못한 것이 태산과도 같다.
인간이 완성되기까지 일만 가지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면,
필자의 것은 하나도 채 못된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필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구실을 준 것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 중에서
유체이탈(遺體離脫)에 관하여 올바르게 씌어진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간혹 언급이 되어 있는 것들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대부분 이었고,
외국의 서적에서 인용하거나 베껴 쓴 외국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한 것들은 공연한 호기심만 자극할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내용들이었다.
그러한 정보는 바른 길을 찾는 이들에게는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필자는 이십 여 년 전에(70년대 초) 우연히 유체이탈을 경험하였고,
십 여 년 전(87년도)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이탈을 해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생(生)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나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의문들이 하나씩 껍질을 벗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필자가 겪었던 의문과 고통과 유사한 이유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먼길을 빙빙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간 적도 많았고, 두려움과 고통,
나 자신의 확신이 의심스러워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였다.
나는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와 비슷한 경로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엉뚱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부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철저하게 필자가 겪은 경험의 산물이다.
과장하거나, 거짓을 사실인양 포장하지도 않았다.
남의 경험이나 이야기를 도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를 자랑 하고자 쓴 것도 아니니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과소평가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었으면 주었으면 좋겠다.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 하나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그 산을 찾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안내문을 한 장 써놓고 지나갔다고 생각 해주었으면 족하다.
바른 길을 찾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유체이탈의 실행 방법만을 기술하지 않고 잡다한 얘기가 서두에 많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 읽어주면 더더욱 고마우리라.
한가지 정말 죄송스러운 것은
필자의 문장력이 미천하여 독자들이 읽는데 불편함이다.
1995년7월에 筆者
목 차
제1부 유체이탈이란 무엇인가?
제1장 유체이탈의 정의......................................6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10
제3장 귀신(鬼神)은 있는가? .............................64
제4장 전생(前生)과 윤회(輪回)...........................72
<잡담>기독교도와의 설전..................................81
제2부 유체 이탈의 실행
제1장 실행에 앞서..........................................99
제2장 가위눌림과 귀접(鬼接)...........................102
제3장 유체이탈의 실행방법.............................113
<여담>
꿈 이야기.....................................................119
안식향 태우는 방법........................................121
성서의 역사...................................................121
유체 이탈 후 실험..........................................122
후기........................................................ 123
제1부 .유체이탈 이란 무엇인가?
제 1장. 유체이탈의 정의
국어 사전에 의하면 유체(遺體)란 “부모님이 물려준 몸”이라고 설명하고있다.
유체(遺體)이탈이란 그 몸(유체)에서 빠져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유체(幽體)라고 쓰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지만, 유(幽)는 몸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거기에 체(體)를 붙인다는 것은 당연히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체 이탈이란 죽은 사람이 아닌 산(生) 사람이 임의로 육신을 이탈하는 행위를 말한다.
육신을 두고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통상, 그것을 “영혼(靈魂)”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부른다.
또, 그것은 방법에 따라서 양신(陽) 이탈과 음신(陰) 이탈로 분류된다.
양신 이탈이란 무엇인가?
단전호흡(丹田呼吸)으로 기(氣)를 운행하여 하단전(下丹田)에 축기(縮氣)하고,
소주천과 대주천이라는 과정을 지나서 수행(修行)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신의 내부에 응집되어 있는 양기(陽氣)를 뽑아내어 인간의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양신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갓난아이처럼 작은데, 아이를 키우듯 양기를 더해가면서 훈련을 시키며 키운다고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방지축(天方地軸)인 양신을 마치 사람 키우듯 정성스럽게 키워 성인 정도로 성장하면, 그때까지 몸담았던 낡은 육신을 태워 없애버리고 자신의 혼(魂)을 양신으로 옮겨 담는다.
양신은 찰나(刹那)에 수 백리를 오고 갈 수 있으며,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양신이탈이다.
다른 말로는“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도 한다.
신선(神仙)으로 화(化)한 것이다.
즉, 양신이탈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신선(神仙)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한 두 번의 삶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들은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삶들을 모아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변변한 저서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누구누구는 신선이 되었다하더라...하는 이야기만 전해져 올뿐이다.
필자도 양신(陽身) 이탈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책에서 읽은 정도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양해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음신 이탈이란 무엇인가?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이 육신이란 옷을 벗어놓고 잠깐 동안 혼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
일부 선도(仙道)인들 중에는 음신 이탈을 위험한 행위로 생각하여 금기 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같이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영혼이 이탈했다가 자신의 육체를 찾아가지 못 한다거나
이탈 중에 다른 혼이 자신의 육신을 차지하고 비켜 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줄잡아 천회가 넘는 이탈을 실행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그리하여 음신 이탈을 위험한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행(行)하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음신 이탈은 인간이 가야할 길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종교에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게 하며, 신의 뜻을 바르게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욱 더 확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고,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쓴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현혹되는 일이 결코 없게 될 것이다.
음신 이탈도 공(功)이 깊으면 팔백 겁(怯)을 환생하지 않고 천상(天上)에 머무를 수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겁(劫)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의 시간이다.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다시 천지개벽하여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이 한 겁이다.
수 만 년이 될지, 수십억 년이 될지 아무도 짐작 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긴 시간이 팔백 번 되풀이 할 동안 천상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관점으로는 영원(永遠)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음신이탈도 공이 깊으면 이렇게 긴(?) 기간동안 천상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음신이탈이 위험하거나 나쁜 행위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이치를 알아내는데 있어서 삶이 윤회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특히 개신교)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가두어진 것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환생(幻生), 전생(前生) 이야기만 나오면 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왜?
삶이란 단 한번뿐이며 그 삶을 끝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배워 왔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취급받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열기란 참으로 어렵다.
윤회를 얘기하고 있는 불교를 우상 숭배 집단으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많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아도 삶이 윤회(輪回) 한다는 것-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성직자(聖職者)들도 더러 있다.
그러면 현재의 기독교에서는 왜 윤회를 부정할까?
그것을 알고 싶으면 교회의 역사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간단한 역사적인 사실 몇 가지만 알아도 그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된다.
중요한 것은 윤회의 법칙을 배제하면 성서(특히 신약부분)조차 해석이 올바르게 되지 않거나 상당히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바른 마음으로 수련하고 유체 이탈을 실행한다면
필자가 헛소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이다.
앞으로 필자의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믿어 주기만 해도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히 천국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믿음이란 유리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과도 같다.
너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함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니
참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다.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한 것이다.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目的)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이 있고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음, 즉 정신(精神)이다.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정신은 영혼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가다듬어 나간다.
정신이 바로 영혼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 상태를 보면 영혼의 상태도 짐작 할 수 있지만, 필설로 영혼을 표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탈을 실행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겠지만,....
보통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것이다.
지식(知識), 학식(學識), 교양(敎養), 재산(財産), 지위(地位), 경력(經歷), 경험(經驗), 외모(外貌) 등이 포함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 평가 기준의 차이가 있고,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가면서 얻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된다.
재물은 물론이고 지식이나 학식 등과 같이 기억 속에 있던 것조차 모두 사라진다.
거의 대부분 본능(本能)만 남게 된다.
음신이탈을 하면 어떤 상태인가?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음신이탈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죽은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가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뇌에 기록된 지식이나 학식 따위들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만 남는다.
흔히들 공(功)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헛것이 많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 어떤 직위에 있었느냐를 중요시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똑같은 일도 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창녀(娼女)도 공을 쌓을 수 있지만
성직자(聖職者)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공을 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부자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 칭송을 받기 위해서 수십, 수 백 억의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나 사찰을 짓는 거창한 행위가,
가난한 사람이 어떤 배고픈 이에게 자신의 밥 한 그릇을 양보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가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쪽에서는 신(神)과 거래를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특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저쪽(저승)에 가보면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들 교회에서의 봉사활동(奉仕活動)이나 불도(佛徒)들의 방생(放生)하는 행위도 본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러면, 재물을 나누어주고 봉사하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하지 마라는 것인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런 행위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이 쌓였으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고,
그런 행위가 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에 할뿐이지,
남에게 칭송 받기 위해서나 신 앞에서 당당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야 한다.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 한 일은 아니니 자신에게 가르치면 점차 가능 해 진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다.
왜 그분은 그렇게 가르쳤을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 깊은 뜻도 모르면서 함부로 정의를 내린다.
그 말씀의 뜻은 스스로 자신 안에서 겸손해져 그런 행위 자체에 스스로 무게를 두지 않고 초연해지는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다.
타인을 의식한다면 이미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공(功)과는 별개의 경지를 가르치고 있는 말이다.
아주 깊은 수양의 경지로 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이다.
“왼손”은 누구요 “바른손”은 누구인가?
흔히들 왼손은 자신이요 바른손은 타인으로 해석한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대부분 그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왼손과 바른손이 모두 한 몸에 붙어있듯이 왼손도 자신이요 바른손도 자신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헛소리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도 있고,
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느낌이 잡혔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설명을 해도 무슨 얘기인지지 모르는 사람은 한동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될 것이다.
그분은 또,
“부자(富者)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였을까?
다른 말로 바꾸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선언(宣言)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철저하게 양심적(良心的)으로 사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 주위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모두 부러워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넓고 호화로운 집, 소리 없이 굴러가는 서민들의 집보다 몇 배나 비싼 자동차, 수 천 만원을 호가 하는 골프 회원권, 조용한 호숫가의 별장,
초호화 아파트, 외산 자재로 치장한 고급 빌라.
이런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탈법, 불법을 하지 않고도 과연 가능할까?
하긴, 우리나라에서 내라는 세금 다 내면 남는 것이 별로 없겠지만...
권모술수 없이,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로채지 않고도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을까?
요즈음은 노태우 씨의 비자금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매스컴의 태도변화는 나날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야당의 태도 또한 주목받을 만 하다.
자신들은 진정 결백한거 같이 떠들어대는 사람들 - 그들 대부분이
사후(死後)에는 비슷한 대접을 받거나 오히려 그 이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을 텐데.
자의든 타의든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자신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후(死後)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는 적당히 감출 수도 있고, 거짓으로 참회 할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지나친 재물욕, 권력욕은 모두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재물에 욕심 없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권력욕(權力慾)이 없는 사람이 권좌(權座)에 오를 수 있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온갖 야비하고 나쁜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때로는 남을 파멸시키기도 해야 하고, 살인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양심을 외면한 채 살아가다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허전해지고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회사업에도 적당히 참여하고, 절에 나가 불공도 드리고
큰돈을 헌납하여 절도 짓고 불상(佛像)도 세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유사한 행위를 한다.
교회에서는 대환영이다.
온갖 칭송과 찬사가 쏟아진다.
어떤 작자들은 그런 행위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속여가면서 더 많이 짜내려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은 자는 마치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부자들은 가진 것이 돈밖에 없으니 돈으로 천국을 사려 할 수밖에 없고,
종교인(宗敎人)들은 그런 약점을 아주 잘 이용한다.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 할 사람이 엄청나게 생겨날 것이다.
나중에 돈으로 때우면 다 되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이미 이 천년 전에 우리들에게 경고(警告)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 권력자와 적당히 야합하거나 그들을 이용한 종교인들은 어떻게 될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필자는 확실히 알고 있다.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 있게 여러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말을 쉽게 믿을 것이요, 어떤 이는 반신반의(半信半疑) 하겠고, 어떤 이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의 말을 믿어 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쉽게 남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괜찮다 싶은 것을 그대로 믿고, 무작정 따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휴거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장본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가를 더 지불해야하고 잘못하면 죽어서까지 연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 중에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는 분들은
반드시 필자의 얘기를 의심(疑心)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본인 스스로 확인하고자 할 테니까.
확인 하고자 하는 과정이 유체이탈이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 - 그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필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일이다.
그저 남의 일일뿐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 중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안다는 것은 지식(知識)의 수준이요 거품과 같은 것이다.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를 묻는 사람이 가끔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면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삼학년부터 시작했지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가장 기본적인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외우는 아이도 있고, 더디게 외우는 아이도 있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결국 거의 다 외우게 된다.
이때, 왜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지, 구구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월이 가다보면 왜 삼삼은 구(3x3=9)가되는지,
팔육 사십팔(8x6=48)이 되는지 스스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또, 그렇게 달달 외우게 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 그 근본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스스로 그것을 깨우치고 난 다음에는 누가 그것을 흔들어 깨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이런 점이 배워서 아는 지식의 수준과는 엄연하게 다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수행을 하다보면 폭탄에 의해 댐이 무너지듯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단번에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러한 경지를 득도(得道)라고
한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스로 득도 했다고 자처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도저히 납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의로 유체 이탈이 가능했던 초기시절에 나의 머리 속에는 아주 작은
전구(電球)가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하나씩, 때로는 두세 개 씩 반짝 하고 켜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다 켜지는 날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득도의 경지인 것일까.
그 많은 불을 언제나 켤 수 있을지 나 자신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또, 얼마나 많은 양이 들어있는지 셈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마다 목적과 가치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게 윤회를 거듭했기 때문에 자연히 수준도 다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켜야 할 전구의 숫자도 각각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밝히려고 하는 자신의 노력과 목적이다.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바르고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환하게 모두 밝힐 날이 올 것이다.
깨달음은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영혼에 각인(刻印) 되는 것이다.
지식(知識)에는 스승이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에는 스승이 없다.
깨달음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지식의 바탕위에 부단한 자신의 노력과 올바른 목적이 있다면
한 가지씩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실천에 옮겨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있다면 그 공(功)은 모두 자신의 것이다.
필자에게 공을 돌리거나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두 자신이 스스로 한 일이다.
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인간적인 아첨에 불과하다.
잘되었든 잘못되었든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사교(邪敎)나 사이비(似而非) 종교인에게 현혹되어 자신을 망친 사람은
모두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타인들을 감언이설로 현혹한 사람들도 그에 상응(相應)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
저승과 이승의 법칙이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이쪽에서는 속임수가 일시적으로 통할 수 있지만, 저쪽에선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쪽에서는 법의 약점을 통해서 양심의 법을 피해 나가기도 하고
합법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쪽에선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전 두환 씨는 구국(救國)의 결단으로 광주사태를 진압했다고 주장하고,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도 나름대로 당위성(當爲性)을 주장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양심(良心)의 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양심은 신(神)이 내린 우주(宇宙)만물(萬物)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그들 밑에서 그들이 시킨 이상으로 과잉 진압하여
공(?)을 세운 장교, 사병들은 책임이 없는가?
이쪽에서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각자 자신이 저지른 만큼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겠는가?
당사자들은 스스로 그 방법을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을 알아내면 이미 반 이상 갚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릴 때 읽은 책에서 어떤 부분이 생각난다.
전쟁 도중 어느 병사가 적국의 한 병사를 사살했다.
소지품을 뒤져보니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노모(老母)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병사는 자신이 사살했던 병사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는 전쟁터에서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자신이 죽인 병사를 대신하여 노모를 모신다는 그런 이야기다.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어린 필자도 제법 감동을 받았나보다.
양심(良心)의 법을 따르면 이승에서의 죄-그 무거운 짐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화(禍)가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삶이 단 한번뿐이라면, 그 한번의 삶을 끝으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生)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 우주(宇宙)의 법칙이다.
필자는 일백 네 번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왔기에 아직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서도 지금의 정신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계속)
댓글목록
견우직녀님의 댓글
견우직녀 작성일
음..
읽어볼만한 글이네요.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