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글-대순전경 초판본 해설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119.♡.137.16) 작성일13-12-11 12:29 조회7,508회 댓글0건본문
제 1 장. 선생의 탄강과 유년시대 (第一章. 先生의 誕降과 幼年時代)
1. 선생의 존함은 강 일순(姜一淳)이시며 증산(甑山)은 그 분의 호(號)이시니 지금으로부터 129년전(2000년 기준) 단기4204년, 서기1871년, 이조 고종 8년 신미년 음력 9월19일, 양력 11월1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에서 탄강(誕降) 하시니라. 선생께서 탄강하신 마을은 원래 객망리(客望里) 손바래기라고 불리워 지던 곳으로 선생께서 오시기 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고 불리워 지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그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라 불리워지니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기(新基)마을 곧 새터이다.
原文: 先生의 姓은 姜이오 名은 一淳이오, 甑山은 그 號이시니 距今 五十八年前 李朝 高宗 辛未 九月十九日에 朝鮮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今 丼邑郡 德川面 新月里)에서 誕降하시니라.
註解: 증산사상의 理解, 증산천사공사기 그리고 한국신흥종교에서는 선생께서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서 탄강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증산사상 연구가인 김 탁은 <증산교리의 체계화과정>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증산이 태어난 곳은 ꡔ증산천사공사기ꡕ (1926)에는 “전라도 고부군 서산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ꡔ대순전경ꡕ 초판 (1929)에는 증산이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에서 태어났으며, “고부군 마항면 서산리”는 그의 외가였다고 기록한다. ꡔ대순전경ꡕ 3판 (1947)에는 ꡔ증산천사공사기ꡕ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증산이 태어난 곳은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 있던 그의 외가였으며, 증산이 태어날 무렵에 양친이 살던 집이 “고부군 우덕면 손바래기(객망리)”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증산의 탄강지는 ꡔ대순전경ꡕ 6판 (1965)에는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로 공식 표기된다. 이처럼 증산의 탄강지가 바뀌게 된 이유는 그의 탄강지에 대한 풍수지리적 설명을 덧붙여 그의 탄강지 자체가 신성화되고, 나아가 증산의 행적이 운명적으로 예정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적 재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탁, 「증산교의 교리체계화과정」, 앞의 책, 160쪽 - 164쪽을 참고할 것.
關聯文獻: 大巡眞理會 典經(1983,이하 典經으로 통칭) 行錄 1章5,6,7 / 甑山道 道典(1993,이하 道典으로 통칭) 1篇 11,12 / 無極眞經,太極眞經(1981,이하 眞經, 太極眞經으로 통칭) 1:1,3 / 大巡典經解說(丁 永奎 著,1984) 1章1/ 甑山天師公事記 / 天地開闢經(李 重盛 著, 龍鳳夷齊院,1992,이하 開闢經으로 통칭) 辛丑篇 5章 / 甑山思想의 理解(李 正立 著,인동,1986) 75p / 韓國新興宗敎(柳 炳德 著, 시인사,1986) 300p
* 大巡典經 3版(丁亥(1947)年 12월22일 간행된 책으로 일제하 시국관계로 빠졌던 부분과 그동안 새로 수집된 자료와 대순전경 초판본의 일부 착오를 바로잡아 보완한 책으로 보통 대순전경이라하면 이 판본을 말한다.) 1章1
2. 선생의 아버님 존함은 흥주(興周)요. 어머님은 권씨이니 선생의 어머님께서 고부군 답내면 (畓內面) 서산리(西山里)에 있는 친정에 근친(覲親)가셔서 계시던 어느 날 하루는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으면서 온 세상이 밝아지는 꿈을 꾸신 후 그 뒤에 태기가 있더니 선생이 탄강하실 때에는 산실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고 밝은 빛이 온 집안을 둘러싸고 그 빛이 하늘까지 뻗어 있더라.
原文: 父의 名은 興周오 母는 權氏니 權氏가 古阜郡 馬項面 西山里 그의 親家에 覲省하엿다가 하로는 하눌이 南北으로 갈나지며 큰 불덩이가 나려와 몸을 덥흠에 天下가 光明하여진 을 고 일로부터 有身하엿더니 그 誕降하실 에 産室에 異香이 가득하며 밝은 빗이 집을 둘너 하눌에 쳣더라.
參考句節: 선생의 성은 강 휘일순, 자는 사옥이오, 증산은 그 호이니라. 부친의 휘는 흥주요 모친은 권씨라. 권씨가 경오 구월 어느 날 밤에 한 꿈을 얻었으니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붉은 덩이가 나타나서 점점 나직하여 몸을 덮음애 그 빗이 천하에 빛나더라. 이로부터 잉태되어 십삼삭을 지나 신미 구월 십구일 자시에 전라 북도 고부군(금 정읍군에 병합되다) 서산리에서 선생께서 탄강하시다. 이때에 그 부친이 잠들었었는데 두 선녀가 하늘로서 내려와 산모를 호위 하는지라. 깨달아 일어나니 곳 분만이 되다. 이상한 향기가 집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에 뻗치어 칠일이 되도록 흩어지지 아니하다.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7)
先生께서 誕降하실 때에 두 仙女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産母를 看護하더니 이로부터 異常한 香氣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에 뻗쳐서 이레동안 繼續하니라.(典經 行錄1章10)
낳으실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두 선녀(仙女)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산모(産母)를 간호(看護)하더니 이로부터 이상(異常)한 향기(香氣)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에 뻗쳐서 이레동안 계속(繼續)하니라. (大巡典經3版 1章3, 眞經 1:8)
註解: 先生의 아버님 휘(諱)는 興周 자(字)는 문회(文會)이며 어머님의 성함은 양덕(良德)이시다.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는 현재 정읍시(井邑市) 이평면(梨坪面) 팔선리(八仙里) 서산부락이며 성령으로 잉태하신 후 열 석달만에 탄강하셨다. 大巡典經과 典經에는 서산리(西山里)로 도전은 서산리(書山里)로 기록되어 있고 大巡典經 原本의 馬項面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으며 증산교 大巡典經3版에는 沓內面이 沓來面 西山里로 기록되어 있다.
關聯文獻: 典經 行錄1章8,9,10/ 道典 1篇13,14/ 眞經1:4,5,7,8/ 大巡典經解說 1章1,3/ 韓國新興宗敎 300p/ 大巡典經3版 1章2/ 甑山天師公事記
3. 점차 자라시면서 얼굴이 원만하시고 성품이 관대하고 후하시며 남다르게 총명하시며 지 혜와 식견이 뛰어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으시니라.
原文: 漸次 자라심에 相貌가 圓滿하시고 率性이 寬厚하시며 聰明과 慧識이 超衆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敬愛를 바드시니라.
關聯文獻: 典經 行錄1章11,20/ 道典 1篇15/ 眞經1:9/ 大巡典經解說 1章4/ 大巡典經3版 1章4/ 甑山天師公事記
4. 어리실 때부터 살아있는 모든 것을 아끼시는 덕이 두터우셔서 나무심기를 즐기시며 자라나는 초목 하나라도 꺽지 아니하시고 아주 작은 곤충이라도 해를 입히지 아니하시며 간혹 위험에 빠진 생물을 보시면 힘써 살리시니라.
原文: 幼時로부터 好生의 德이 富하사 種樹하기를 즐기시며 자라나는 草木을 折치 아니하시고 微細한 昆蟲이라도 害치 아니하시며 或 危機에 瀕한 生物을 보시면 힘써 救援하시니라.
參考句節: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호생하는 덕이 많으사 나무 심으시기를 좋아하시며 비록 곤충미물이라도 상해치 안으실 뿐더러 혹 위태한 데 다다른 물건을 보시면 힘을 다하여 구원하시다. (甑山天師公事記)
하루는 先生의 父親께서 벼를 말리시며 새와 닭을 심하게 쫓으시니 先生께서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사람을 먹일 수 있겠나이까.” 하시며 만류하시더니 부친이 듣지 않고 굳이 쫓으니 별안간 한 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하니라. (典經 行錄1章22, 道典 1篇16, 眞經 1:16, 大巡典經解說 大巡典經3版 1章11)
경석이 논에 나리는 새떼를 굳이 쫓거늘 가라사대 한떼 새의 배 채움을 용납지 못하니 어찌 천하 사람의 배 채워 주기를 뜻하리요.(大巡典經3版 6章113)
關聯文獻: 典經 行錄1章11,22/ 道典 1篇4,5/ 眞經1:10/ 大巡典經解說 1章5/ 大巡典經3版 1章5/ 甑山天師公事記
5. 선생께서 서당에 들어가셔서 한학을 배우실 때 한 번 들으신 것은 곧 그 자리에서 깨달으시고 동무들과 함께 글을 지으실 때는 항상 장원을 하시니라. 하루는 선생의 스승이 다른 여러 학부형에게 미움을 받을까 하여 선생 다음으로 뛰어난 학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미리 속으로 마음을 정하고 시험을 보았더니 또 선생에게 장원이 돌아가거늘 이것은 선생께서 스승의 속마음을 미리 아시고 다른 학동과 선생의 문체와 글자모양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 모든 일에 이렇게 지혜롭고 현명하심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 놀랍고 이상하게 생각하니라.
原文: 書塾에 드러 漢學을 배우실 새 한 번 들은 것은 곳 다르시고 동무들로 더부러 글을 지으심에 恒常 壯元을 하시니라. 하로는 스승이 여러 學父兄에게 뮈움을 바들가하여 文章이 次號되는 他兒에게 壯元을 주려고 內意를 定하고 考試하엿더니 先生에게로 壯元이 도라가니 이는 先生이 스승의 內意를 미리 아르시고 文體와 字樣을 變하야 辨別치 못하게 하신 닭이라. 모든 일에 이러케 慧明하심으로 보는 者가 다 驚異하니라.
參考句節: 육세(1876)에 비로소 서숙에 들어 한문을 배우셨는데 한 번 배운 것을 문득 깨달아 스승의 익혀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시다. 붕배와 함께 글을 지으면 늘 장원을 함으로 하로는 스승이 장원을 타아에게 주려고 내정하고 고시한 결과 또한 장원이 선생에게로 돌아갔으니 이는 선생께서 자체를 변하야 쓰신 까닭이어라.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14)
丁丑(1877)年에 先生의 父親께서 訓長을 구하여 先生께 千字文으로 글을 가르 치실 때 하늘 天字와 따지 地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으시나 검을 玄字와 누루 黃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지 아니하시거늘 訓長이 할 수없이 그친지라. 父親이 안방으로 불러들여 그 緣故를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하늘 天字에 하늘의 이치를 다 알았고 땅 地字에 땅의 이치를 모두 알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사오리까.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니 돌려보내 사이다.” 하시니 父親께서 할 수없이 訓長을 돌려 보내시니라. (道典1篇15, 眞經 1:12, 大巡典經解說 1章7, 大巡典經3版 1章7)
아홉 살 되시던 기묘년(1879,己卯)에 부친께 청(請)하여 후원(後園)에 별당(別堂)을 짓고 홀로 거처(居處)하사 외인(外人)의 출입(出入)을 금하시고 간일(間日)하여 암꿩 한 마리와 비단 두자 다섯 치씩 구하여 들이시더니 두 달 후에 문득 어디로 나가셨는데 방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더라. 그 뒤에 집으로 돌아오사 자의(自意)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8, 眞經 1:13, 龍華典經)
부친이 정읍 읍내 박 부호(朴富豪)에게 수백 냥 빚이 있어서 독촉(督促)이 심하므로 걱정으로 지내거늘 선생께서 부친께 청하여 돈 오십냥을 준비하여 가지고 박 부호에게 가사 돈을 주시고 그 집 사숙(私塾)에 가서 학동들과 싸여서 노실 새 훈장이 운자(韻字)를 불러 학동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니 선생께서 함께 글짓기를 청하사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심에 시격(詩格)이 절묘(絶妙)하거늘 훈장과 학동들이 크게 이상히 알며 박 부호도 심히 기이(奇異)히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子侄)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선생께서 부득이(不得已)하여 며칠 동안 머무르시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박 부호가 모든 일에 크게 기특(奇特)히 보고 심히 사랑하여 드디어 채권(債權)을 포기(抛棄)하고 증서(證書)를 불사르니라.(大巡典經3版 1章10, 眞經 1:15)
열세 살 되시던 계미년(1883, 癸未)에 모친이 친히 짠 모시베 예순자를 마을사람 유 덕안(柳德安: 眞經에는 兪德安)에게 들리사 정읍장에 팔러 가셨는데 덕안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가고 선생께서는 모시베를 포목전(布木廛)에 놓고 앉으셨더니 문득 헛 눈을 파는 사이에 모시베를 잃어버렸더라. 덕안이 이 말을 듣고 빨리 돌아와서 찾으려하나 날은 저물고 많은 사람중에 찾을 길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시기를 청하니 선생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즉시 고창으로 가시며 가라사대 내일 들어가리라 하시거늘 덕안은 어 찌하는 수 없이 혼자 돌아가니라. 이튿날 선생께서 모시베 값을 가지고 돌아와서 모친께 올리시니 온 집안이 이상히 여겨 사실을 물으매 가라사대 모친이 무한(無限)한 근고(勤苦)를 들여서 짜신 물건(物件)을 잃었음에 얼마나 애석(愛惜)히 생각하실까 하여 오늘이 고창장(高敞場)이므로 반드시 시장에 나올 듯 싶어서 바로 고창으로 갔더니 다행히 찾아서 팔아왔나이다 하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12, 眞經 1:17)
열일곱 살 되시던 정해년(1887, 丁亥) 어느날 外家에 가시더니 어떤 술주정꾼이 무고(無辜)히 패욕(悖辱)을 가(加)하거늘 선생께서 아무 대항(對抗)도 하지 아니하시더니 문득 어디서 큰 돌절구통이 떠내려 와서 주정꾼의 머리 위로 덮어 씌우니 주정꾼이 절구통 속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선생께서 몸을 빼쳐 다른 곳으로 가시니라. (典經 行錄1장18, 眞經 1:20, 大巡典經3版 1章13)
선생께서 일곱 살(1877, 丁丑)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訓長으로부터 놀랄 경 (驚)의 韻을 받으시고 글을 지으시니 이러하니라. “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 (발걸음을 멀리 옮기려 하니 땅이 갈라질까 두렵고 크게 숨 쉬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 (典經 行錄1章12/ 道典1篇9)
關聯文獻: 典經 行錄1章12,13/ 道典 1篇20,22,23,24,25/ 眞經1:14/ 大巡典經解說 1章7 / 大巡典經3版 1章9/ 甑山天師公事記
6.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학업은 일찍 그만 두시니라.
原文: 家勢가 貧乏함으로 學業은 일직 廢하시니라.
參考句節: 서산리로부터 동군 우덕면 객망리에 이거하사 집 뒤에 시루 산이 있음으로 증산이라 호하시다. 원래 집이 가난하야 십사오세(乙酉年)에 학업을 중지하시고 사방에 주유하사 井邑郡 笠岩面 巨沙幕에서 남의 머슴이 되야 보리를 거두신 일이 있으며 長城郡 白羊寺 부근 扶餘谷에서 나무 버이신 일도 있으니라.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18)
* 증산선생께서 용봉이란 호를 가진 적이 있다는 설에 대하여 김탁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증산은 晉州 姜氏이며, 본명이 一淳이다. 그런데 증산의 어릴 때 이름이 龍鳳이라는 주장이 있다. 홍우, ꡔ東學入門ꡕ (일조각, 1977), 23쪽. 그러나 龍鳳은 1903년 4월에 증산이 모악산 청련암에서 대원사 주지였던 박금곡에게 써 준 필적으로 ꡔ대순전경ꡕ 앞부분에 전한다. 따라서 증산이 “용봉”이라는 兒名을 가졌었다는 그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가 증산이라는 호를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살았던 동네의 뒷산 이름에서 연유한다. < 西山里로부터 同郡 優德面 客望里에 移居하사 집 뒤에 실우산이 잇슴으로 甑山이라 號하시다. --- (ꡔ증산천사공사기ꡕ 2면) > 그런데 후대의 일부 증산교단에서는 그가 증산이라는 호를 지니게 된 것 자체가 그의 신성함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甑이 솥과 시루를 뜻하며, 이는 설익어 편협하고 미완성 상태인 이제까지의 인류문명을 익혀서 완성시킨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닌 예정된 조화를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 안경전, ꡔ이것이 개벽이다ꡕ 상 (대원출판사, 1984), 329쪽 - 330쪽.> 그러나 초기 경전에서 증산이라는 호를 지닌 연원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후대의 덧붙임이라고 판단된다.
여러 서당으로 자주 다니시며 글을 읽으시는데 학문이 秀逸하시므로 혹 누가 선생께 글 쓸 일을 부탁드리면 써 주시되 반드시 끝에 한두 자 쓸만한 餘白을 남기시니라.(眞經 1:19)
이십사세(1894,甲午)에 金溝郡 草處面 內住洞 鄭南基(선생의처남)의 집에 서숙을 설하시고 그 아우 영학과 이웃 학도를 모와 한문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이 사도에 맞아 송성이 높으니라.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23)
* 鄭婦人은 庚辰(1880)年 음력 정월30일 전라도 김제군 초처면 내주평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봉남면 내광리의 하동 정씨가에서 탄생하시고 선생과 혼인하시니 신묘(1891)년 선생께서 21세 되시던 해이며 이때 정부인은 12세이시니 정부인께서는 한쪽 발을 저는 불구의 몸이시더라.(龍華典經)
선생께서 열네살 되시던 갑신(1884)년 늦가을에 하동 정씨 문중에서 청혼이 있거늘 즉시 허혼하고 자부(子婦)를 맞이하니 몸이 정상이 아니요. 심덕(心德)이 곱지 못하더라. (道典 1篇18)
신축(1901)년 6월 초에 선생께서 시루봉 밑에서 열나흘간 수도하실 때 정부인께서는 하루 세끼 밥을 지어 올리는데 세 번 목욕하고 세 번 옷을 갈아 입었다. 시댁이 빈한하여 옷이 단벌이라 홋치마를 입고 겉옷을 빨아 말리다가 비가오면 화로에 쬐어 말리곤 하였다. 하루는 정부인이 밥을 지어 선생께서 수도하시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뇌성이 크게 일고 비가 쏟아져서 寸步도 옮길 수 없어 주저하다가 시간을 어겨서는 안되지 하고 처마 끝에 나서면서 눈을 꽉 감고 발을 내디뎌 종종걸음을 쳤더니 문득 선생께서 수도하시는 움막에 당도하였다. 선생께서 정부인의 고생을 위로하시니라. 정부인이 밥을 올릴 때 비가 오면 그릇이 조금도 비에 젖지 않고 날이 좋은 때와 같았다. 선생께서 즉시 돌아가라 하시므로 수도하시는 움막 문을 나서니 또 순식간에 돌아 왔다. 선생께서 수도하실 때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선생께서 도를 이루신 후 정부인은 삭발을 하고 광인처럼 처신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인을 선생께서 화천하신 뒤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숭배하여 信徒가 되었다.(龍華典經)
정씨부인(鄭氏婦人)이 간곡(懇曲)히 말씀하여 가로대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시고 집에서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 하니 선생께서 가라사대 그렇게 적은 말이 어디 있느뇨 하시고 이로부터는 집에 가까이 아니 하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33)
이 해(1901, 辛丑) 겨울에 본댁(本宅)에서 비로소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실새 창문에 종이를 붙이지 아니하시고 부엌에 불을 때지 아니하시며 홑옷을 입으시고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사 아흐레 동안을 지내시니 새가 벼 말리는 뜰에 내리지 않고 이웃사람은 공포증(恐怖症)이 들어 문 앞으로 지나기를 어려워 하더라.(大巡典經3版 2章2)
이 때에 선생께서 늘 천하창생의 운명을 깊이 걱정하시거늘 정씨부인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불화를 일으키니 선생께서 때로 심히 우울해 하시며 집을 떠나시니라. 하루는 정씨부인이 간곡히 말씀드리기를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시고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적은 말이 어디 있느냐” 하시고 이 후로는 집을 가까이 아니하시니라.(道典 1篇32)
辛丑年(1901) 여름에 본댁으로 돌아오셔서 先代의 功名帖을 불사르시니라. 정씨부인이 말씀드리기를 “이제는 그만 눌러 앉으셔서 남과 같이 집에서 재미있게 살림에 힘을 쓰사이다” 하시니 “그렇게 소인다운 말이 어디 있느뇨” 하시고 이로부터 본댁에 자주 들리시지 아니하시니라.(眞經 1:48)
구릿골에 계실 새 하루는 황 응종이 와서 뵈옵고 부인에 관한 친명을 전하거늘 선생께서 형렬, 자현, 보경, 공숙등 여러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가정사는 친명 대로 처리하노니 너희들이 증인을 설지니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공사에는 수부(首婦)가 있어야 하나니 수부를 천거하라 하시니 형렬이 둘째딸로 하여금 수종들게 하니라.(大巡典經3版 4章13)
갑진(1904)년에 선생께서 구릿골에 계실때 황 응종이 와 뵙고 “정씨부인과 인연을 끓으라.”는 부친의 명을 전하니 이는 이때에 고부 본댁에서 정씨부인이 시부모에게 불효하여 집안이 화평하지 못함으로 부친께서 황 응종을 보내 이 사실을 말씀드리게 함이라...(중략)...그 후에 하루는 정씨 부인이 구릿골에 찾아왔거늘 선생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라. (道典 3篇64)
구릿골에 계실 때 하루는 황응종이 와서 뵙고 鄭婦人에 대한 부친의 命을 고하니 선생께서 형렬, 자현, 보경, 공숙등에게 말씀하시기를 “家庭事는 親命대로 처리하리니 너희들이 증인이 되니라” 하시니라 (眞經 4:16)
기유년 이월에 자현을 데리고 김제 내주성 정남기의 집에 가사 일러 가라사대 이 길이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妻族)들을 낱낱이 찾으리라 하시며 등불을 들리시고 밤새도록 여러집을 찾으신 뒤에 이튿날 새벽에 수각리 임상옥의 집에 가사 공 사를 보시고 만경 삼거리에 이르사 쉬시며 가라사대 오늘 오후에 흰 무지개가 해 를 꿰이리니 내가 잊어버리더라도 네가 잘 살펴보라 하시더니 과연 오후에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니라.(大巡典經3版 9章5)
註解: 龍華典經의 기록은 아주 다르다. 그것은 甑山道가 高婦人만을 신앙하고 대순진리회나 태극도에서는 首婦를 들이신 일을 증산선생께서 행하신 首夫公事로 보는데 비하여 甑山法宗敎, 龍華典經을 쓴 김낙원의 오동정교단, 미륵종(戊乙敎), 淸道大享院등에서는 首婦 세 분중 高婦人, 鄭婦人 두 분을 모시거나 金婦人까지 세 분을 아울러 모시기 때문인데 어느 분을 모시느냐에 따라 교리의 주장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증산선생께서 정부인을 맞아들여 결혼하신 것에 대해서는 두가지 說이 있는데 양친의 지나친 간선으로 나중에는 중매하는 매파가 나서지 않으므로 초조하고 당황하여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결심하고 간선없이 정해진 혼인이라는 說과 중매를 서려고 매파가 다녀간 뒤에 양친에게 그 매파가 천거한 규수집 이야기를 증산선생께서 듣고 그 집 先代의 家系와 親族의 人品과 惡習을 낱낱이 말씀하심으로서 좀처럼 혼인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說이 있다. 그러나 선생의 어린시절 비범하신 여러 일화로 미루어 볼 때 정부인을 맞아들이신 것은 막중한 인륜대사인 혼사에 대해서도 人道에 입각한 정대한 주견을 가졌으리라 생각되며 정부인과 결혼하셔야 할 천지이치를 깨닫고 그대로 행하신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정부인이 한쪽 발을 저는 불구의 몸과 박색의 형용으로 증산선생과 부부의 의를 맺고 선생의 수도하심을 돕고 선생께서는 정부인을 싫다 않고 맞아들이사 정을 주시고 딸을 두시며 조강지처로 온전한 예모를 갖추어 대하신 것이나 선생께서 成道하신 신축(1901)년 그 해 겨울에 본댁에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것이나 화천하시던 해 기유(1909)년 2월에 이 길이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들을 낱낱이 찾으리라 하시고 등불을 들리시고 밤새도록 여러 집을 찾은 것은 정부인을 수부로서 예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부인은 빈한한 집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애써 시봉하였으나 천품을 잘못 타고나서 시부모의 귀여움을 받아보지 못하였고 선생께서는 수도에 전념하시느라 방랑객처럼 나다니시므로 젊어서 한스러운 세월을 보냈고 늦게 딸을 두어 기르며 선생께서 화천하신 후로도 시종 시부모 공양에 게으르지 않는 등 선생의 수도하시는 뒷바라지에 성의를 다해 공덕을 쌓으신 분이므로 정씨 부인에 대해서는 편견을 두지 않는 새로운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關聯文獻: 眞經1:18, 首婦信仰(dodam.net)
어진벗 13-07-02 00:33 댓글상단
약기운이 골수까지 퍼져있었는지 자꾸 어지럼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립니다
비싼수업료로 끝난줄 알았는데 희망사항였을뿐 결코 끝이 아니었고
병든 약기운의 금단현상이 여전히 날 움켜쥐고 있는 이런 내모습을 봅니다
그라운드 제로.를 주문처럼 마음에 자꾸 새깁니다
선도신정경 말씀처럼 저를 잘 믿어야 상제님도 잘 믿을수 있다니
방벽에도 기대지말아야된다고 배웠어도 이 어지럼증엔 수부님께 좀 기대고 숨을 쉬어 봅니다 숨 좀 고르고
그라운드 제로로 할수있다고 자꾸 새겨 목넘김에 애씁니다
푸른글님 고맙습니다
답댓글
물푸레나무님의 댓글
물푸레나무 13-07-02 07:41 댓글상단
선생께서 도를 이루신 후 정부인은 삭발을 하고 광인처럼 처신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인을 선생께서 화천하신 뒤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숭배하여 信徒가 되었다.(龍華典經)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전에 교육받은 내용들과 너무나 다르군요
답댓글
자유인님의 댓글
자유인 13-07-02 11:59 댓글상단
대순전경 초판본에 대해 오랜시간 연구해오신 것을 올려주셔서
참신앙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시는 푸른글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같은 성구를 다른 경전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비교하며 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아울러 푸른글님의 해설까지 읽어보니 그냥 원문과 해석만 읽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아요^^
대순전경 초판본 해설강의 수강신청합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