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글-초판본 대순전경을 제일먼저 부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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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119.♡.137.16) 작성일13-12-11 12:26 조회7,668회 댓글0건본문
홍범초 교수의 <범증산교사> 중에서
一. 창립주(創立主)-운산(雲山) 안세찬(安稅燦)의 교력(敎歷)
운산(雲山)은 임술(壬戌 1922)년 7월 15일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산면(大山面) 운산리(雲山里)에서 안병욱(安柄彧)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원명(原名)은 세찬(世澯)이요, 한 때 흥찬(興燦)이라 한 적이 있고 후일 호(號)를 운산(雲山)이라 하였다. 안병욱(安柄彧)은 본시 보천교(普天敎) 교인으로 보천교주 차경석(車京石)이 서거 하였을 때 복(服)까지 입은 열성교인이었다. 안병욱(安柄彧)은 종도(宗徒) 이치복(李致福)에게서 도(道)를 받았다 했고 운산(雲山)은 부친에게 도를 받은 것으로 말했다.
안병욱(安柄彧)은 보천교에 다니던 일제(日帝) 시대에 천안 경찰서에 유치(留置)된 일이 있었다. 이 때 안병욱은 같은 유치장에서 보천교 교인으로 충남(忠南) 아산군(牙山郡) 온양읍(溫陽邑) 초사리(草沙里) 사람 원응섭(元應燮) 이응상(李應祥)을 만났는데 어린나이로 아버지 시식을 들고 다니던 운산이 여기서 원응섭 이응상을 본 것이 훗날 함께 봉교(奉敎)할 인연을 만들었다.
운산(雲山)이 현 증산교(甑山敎) 전(前) 대법사(大法社) 종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을유(乙酉 1945)년 8.15광복 후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 형제가 중심이 되어 그해 9월 19일 대순절(大巡節)에 서울 마포구(麻布區) 합정동(合井洞) 최위석(崔偉錫) 집에서 치성을 올리고 교화단체 대법사(大法社)를 창립할 때 여기에 참석한 뒤부터였다.
대법사(大法社)는 창립치성에 참석한 145명의 교인을 중앙통제위원(中央統制委員)으로 선임하여 중앙통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중앙통제위원회는 위원장 한 사람과 중앙상무위원(中央常務委員) 6인으로 하여금 통솔케 하여 위원장에 이상호(李祥昊) 상무위원 겸 총무부장에 이정립(李定立) 교무부장에 최규석(崔奎錫) 경리부장에 최위석(崔偉錫) 조직부장에 김규찬(金奎燦) 사업부장에 정상종(鄭商鍾) 외사부장(外事部長)에 임성호(林誠鎬)가 각각 선임이 되었다.
통제위원은 각기 동지를 모아 육단(六段)으로 육임(六任)을 조직하기로 하고 임시사무소를 서울시 필운동(弼雲洞) 89번지 순교인(殉敎人) 임경호(林敬鎬)의 집에 두었다.
안병욱이 어느 때 이상호(李祥昊) 이정립(李定立) 형제를 따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병욱은 아들 운산에게 말하기를 ‘네가 일을 하려거든 아산(牙山)의 원응섭(元應燮) 이응상(李應祥) 두 사람과 손을 잡으라 했다 한다.
원응섭 이응상 두 사람은 인근에 덕망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운산(雲山)이 원응섭 이응상과 함께 정해(丁亥 1947)년에 아산군(牙山郡) 배방면(排芳面) 남리(南里)에 와서 윤철원(尹哲元) 반상철(班相喆)에게 포교하니 이들이 아산지방에서 대법사(大法社)에 입교한 최초의 교인이었다.
이 때 운산은 대법사 교주 이상호(李祥昊)의 출생지가 전남(全南) 해남군(海南郡) 삼산면(三山面) 구성리(九星里)인 것을 비결의 진인해도출(眞人海島出)에 비유하면서 포교에 열성을 다했다. 이후에 서산(西山) 아산(牙山) 지방의 교인의 수효가 수백세대에 이르렀고 인접지역인 공주(公州) 천안(天安) 등지로 전파되어 적지 않은 교인이 늘어났다.
운산은 6.25사변이 일어난 경인(庚寅 1950)년 섣달에 공주군(公州郡) 신풍면(新豊面)에 사는 임헌교(林憲敎)의 집에 가서 1주일간 피난갈 때 임현교에게 말하기를 ‘의통인패(醫統印牌)를 만들자!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 형제가 만드는데 우리가 못 만들 이유가 어디 있나?’ 하였다. 의통인패는 대법사 창립 때부터 병겁(病劫)에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비전(秘傳)의 신물(神物)이다. 운산의 위 말이 교본부에 전해지자 대법사 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그의 동생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은 아무나 의통인패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드는 과정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밝히며 이로부터 운산을 경계(警戒)하게 되었다.
二. 운산(雲山) 대법사(大法社)간부와 불화(不和)
대법사(大法社)는 신묘(辛卯 1951)년 음력 2월에 원평 장승백이에서 호신부(護身符)와 임패를 만들 때 인육(印肉)의 제조에 필요한 경면주사(鏡面朱砂) 15근을 운산이 자기의 연원(淵源)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공주(公州) 부여(夫餘) 지방에서 거출하여 냈고,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의 책임을 맡아 자긍(自矜)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운산이 호신호부(護身戶符)의 배부(配付)와 의통구호단의 인원배정(人員配定)을 자기의 연비(連臂)에 유리하도록 짠데다가 장승백이에서 만든 호신부와 인패를 자기 연비 교인들을 시켜 모두 가져갔으므로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李元浩)같은 이는 ‘충청도 사람만 사람이냐, 만일 안세찬(安世澯)연비의 의통구호단이 경상도에 내려오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겠다.’ 고 분개했다.
당시 지방별로 많은 교인을 거느린 대연원주격(大淵源主格)인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李元浩), 배동찬(裵東燦), 경기도의 원제철(元濟喆) 유흥고(柳興?), 충청도의 김종렬(金鍾烈) 등은 운산(雲山)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 대립하게 되자 운산(雲山)은 자기가 많은 교인을 포교하여 교세를 떨치게 하였고 의통인패의 제작을 가능케 하였으며 의통구호단을 조직해 놓으니 이 공로는 인정해주지 않고 교주 청음과 남주는 자기에게 대드는 두령들 편을 들어 자기를 몰아내려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교본부(敎本部)에서 박복만(朴福萬)을 시켜 자기를 해치려 했다고 까지 항의하게 되었으니 운산(雲山)이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 밑에서 교(敎)를 함께 신봉할 수 없게 되어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大法社)를 떠났다. 이로서 운산은 을유(乙酉 1945)년 9월 19일 대법사 창립에 참가한 이후 6년여 간을 몸담아 종교활동을 해온 대법사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대법사를 나온 운산은 공주군(公州郡) 유구(維鳩)에서 직조기(織造機)를 놓고 인조견사(人造絹紗)를 을미(乙未 1955)년 까지 짰다. 병신(丙申 1956)년에는 대전시(大田市) 중동(中洞)으로 이사하여 상업(商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그 후에는 한의술(韓醫術)로 자녀의 학비를 보탰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면서도 커가는 자녀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고 관심을 보이는 어린 아들들에게 여늬 사람과 다른 가정교육을 시켰다.
三. 운산(雲山)의 용화동(龍華洞) 재출입(再出入)과 연원논쟁(淵源論爭)
운산이 오랜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전에 자기의 연원지역(淵源地域)으로 생각되는 충남(忠南) 아산(牙山) 서산(瑞山) 예산(禮山) 등지에 가서 한 말 가운데 대법사 창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을 비난하고 대순전경(大巡典經)의 장절(章節) 가운데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한 말은 전에 대법사(大法社)에 다니던 교인들로서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또한 운산이 말하기를 자기가 대법사 창립에 참가하여 종교활동을 할 때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에게 지도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동지적(同志的)인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8.15광복 후 대법사를 창립할 때의 운산의 처지는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8.15광복 후 대법사창립에 참가한 운산은 임술(壬戌 1922)년 7월 22일생인 24세의 청년이었고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는 무자(戊子 1888)년 2월27일생으로 57세요,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은 을미(乙未 1895)년 2월 19일 생으로 50세였으니 운산에 있어서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은 부집(父執)의 존장이었다.
더욱이 청음, 남주 두 분은 보천교(普天敎)의 방주(方主)였었고 보천교를 나와서는 대성(大聖:증산상제님)의 성훈(聖訓: 성스러운 말씀)과 성적(聖跡:성스러운 발자취)을 찾고 엮어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여 무진(戊辰 1928)년 동지(冬至)에 동화교(東華敎)를 세웠다가 계미(癸未 1943)년 8월에 체포되어 8.15 광복 후에 출옥한 교계(敎界)의 중진(重鎭)이었으니 연령으로 보나 신앙의 열력(閱曆)으로 보나 운산 안세찬(安稅燦)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 두 분이 평등한 동지적(同志的)인 인간관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여지며 대순전경의 상당한 부분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의 권위까지 허물고 무엇을 가지고 종교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하여 그의 종교적 양식(良識)을 의심하게 되었다.
운산이 과거에 자기의 연비가 많았다고 하는 증산교의 아산지부와 서산지부의 월례회에 참석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앞으로 증산교(甑山敎) 대법사(大法社)는 연원주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종교운동을 전개하자고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교인이 말하기를 ‘운산이 20여년 전에 자식을 낳아서 팽개쳤다가 그 자식이 천신만고 끝에 성장하여 사람구실을 겨우 하게 되니 나타나서 내가 네 아비니 나에게 효도를 하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운산이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의 인격을 격하(格下)하고 자기의 연원주(淵源主)가 종도(宗徒) 이치복((李致福)이라고 하면서 옛 연원주인 자기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에 크게 반발한 것이었다. ‘운산이 23년 전 포교할 때 교인들에게 청음(淸陰) 남주(南舟)를 따라 증산대성(甑山大聖)을 믿으라했지, 우리 보고 언제 이치복((李致福)을 따라 증산대성(甑山大聖)을 믿으라 했느냐. 엄밀하게 말하면 23년 전의 운산은 용화동 청음(淸陰), 남주(南舟) 앞으로 교인을 인도한 지로가(指路使:길잡이)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운산이 자신의 연원주가 청음(淸陰), 남주(南舟)가 아니라고 한다면 청음(淸陰), 남주(南舟)를 연원주로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는 23년간 교단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연비교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그대들의 연원주이니 나를 중심으로 뭉쳐서 종교운동을 하자는 것은 그간 수도해서 고덕대현(古德大賢)이 되었을지라도 하기 어려운 말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옛 연비되는 교인들과 모든 일을 상의해서 일을 하자 했어야 옳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의론이 분분하면서도 몇몇 교인들은 옛 정을 생각하여 대전시 대사동에 있는 운산의 집을 오갔지만 아산 서산지방의 교인들과 운산과의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 후 운산은 을묘(乙卯 1975)년 10월 초순에 용화동을 방문하여 원로교인들이 있는 사석(私席)에서 자기의 소신을 말했으나 공감(共感)을 얻지 못했고 박기백(朴碁伯)같은 이는 운산의 주장이 경위를 가리지 못하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의통에 대한 글>
대순전경 초판본(푸른글 졸역)
제 10 장. 문 명 (第十章. 文 明)
병의 형세에 대한 글 (病勢文)
병에는 세력이 큰 병이 있고 세력이 작은 병이 있으니(病有大勢, 病有小勢)
병이 큰 데는 약이 없고 병이 작을 때에는 혹 약이 있으니(大病無葯, 小病或有葯)
큰 병의 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작은 병의 약은 사물탕 팔십첩이니라.
(然而大病之葯 安心安身, 小病之葯 四物湯八十貼)
기도(祈禱)
하느님을 모시고 조화의 자리에 합하여 그 은혜를 영원토록 잊지 않고 있사오니 모든 일을 다 알게 하시고 지극한 기운을 이제 이르게 하시어 크게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
큰 병이 생기는 것도 도(道) 없음에서 비롯되고 작은 병이 생기는 것도 모두 도(道) 없음에서 생기나니
(大病出於無道, 小病出於無道)
도(道)를 다시 회복한다면 큰 병이나 작은 병이나 약 없이 저절로 나으리라. (得其有道則大病勿葯自効小病勿葯自効)
지극한 기운이 이제 이르사 사월에 오시고 예(禮)로써 화답하니 의통(醫統)이라.(至氣今至四月來 禮章)
의통(醫統)
나라의 은혜를 잊은 자도 무도(無道) 함이요 (忘其君者無道)
어버이의 은혜를 잊은 자도 무도(無道) 함이며 (忘其父者無道)
스승의 은혜를 잊은 자도 무도(無道)함이니 (忘其師者無道)
이 세상에 충과 효와 열이 사라짐으로서 천하가 모두 병들었느니라. (世無忠世無孝世無烈是故天下皆病)
병세(病勢)
천하의 병을 낫게 하려고 마음에 뜻을 품은 자는 천하에 있는 약을 써야 병을 낫게 하리라. (有天下之病者 用天下之葯厥病乃愈)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도(道)이니 천지의 도술을 받들도록 하고 약국은 전주 동곡에 있는 도술약국이니 살고 죽음의 생사 판단을 하는 곳이니라.
聖父
聖子 元亨利貞奉天地道術葯局在全州銅谷生死判斷
聖神
크게 어질고 크게 의로우면 병이 없을 것이며 (大仁大義無病)
해원을 다한 삼계의 복마들을 관성대제가 진압하리라. (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
세상 돌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살 기운이 붙어 있고 (知天下之勢者有天下之生氣)
세상 돌아가는 법을 모르는 어두운 사람에게는 죽을 기운이 붙어 있느니라.(暗天下之勢者有天下之死氣)
동방세계에 큰 성인이 계시니 동학이요. (東有大聖人曰東學)
서방세계에 큰 성인이 계시니 서학이라. (西有大聖人曰西學)
이는 모두 사람들을 가르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데 그 사명이 있느니라.(都是敎民化民)
공자는 노나라의 대사구 관직에 있었고 (孔子魯之大司寇)
맹자는 제나라와 양나라 군주에게 선한 정치를 펴도록 하였느니라. (孟子善說齊梁之君)
가까운 장래에 邪道를 바로잡고 正道를 세우시는 태양(日)이시며 근본(本)되시는 문무신(文武神)이 겸하여 도를 통하게 하려니와
(近日日本文神武神並務道通)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은 의탁할 곳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문자와 오음으로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노라.
(朝鮮國上計神中計神下計神無依無托不可不文字戒於人 宮商角徵羽)
성인께서 선천에 사람이 마땅히 천하를 위해 해야 할 직책과 업무를 지으시니 (聖人乃作先天下之職先天下之業)
그 직책은 사람을 구해 살리는 일이요, 그 업무는 선천의 기운들을 통합하는 일이라. (職者醫也業者統也)
성인의 직업은 의통이니라. (聖之職聖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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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문이님의 댓글
홍석문이 13-07-04 21:24 댓글상단
대순전경은 현무경과 함께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경전입니다. 현무경은 직접 친필하셨으니까 말할 것도없고 대순전경은 서전서문 공사에 의하여 나온 우리의 교과서입니다. 우리는 지금 진리말씀의 홍수속에서 뒤죽박죽 증언인가 출처가 있는가 어디인가 도 모른체 교리의 틀도 잡혀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많은 말씀을 한 줄로 꿸려면 말씀들의 진짜가짜를 가릴려면 말씀의 중요도를 입체적으로 구성할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대순전경을 밀독 해야합니다. 다 아는 말씀이라고 소홀히 마시고 이 책을 문제의식을 가지고 애정있게 읽어야합니다. 빨리 *산도의 머리를 비워야 합니다. 원점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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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전님의 댓글
신비전 13-07-05 02:34 댓글상단
푸른글님이 인용하신 범증산교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보다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합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장승백이에서 만든 호신부와 인패를 자기 연비 교인들을 시켜 모두 가져갔으므로>
라는 부분입니다. 당시 단체의 사령탑이 있고, 교단의 중심이 되는 윗어른들이 있을 것인데, 왜 안세찬이라는 젊은 분이 모두 가져가게 된 것인지, 그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당시 30살 밖에 안된 아주 새파란 젊은 사람이 모두 가져 갈수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여간 시간과 더불어 진실을 밝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이 당시에 포교 좀 했다고 해서 뭘 착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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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놈의세계님의 댓글
상놈의세계 13-07-05 04:28 댓글상단
충격적입니다. 교주 허락도 없이 의통을 만들고 교권을 장악하려 하다니...
이치복 성도 연원이면 이치복 성도 따라가서 교단 세울 일이지 청음 남주의 교단에 들어간 것부터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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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놈의세계님의 댓글
상놈의세계 13-07-05 04:40 댓글상단
"운산의 위 말이 교본부에 전해지자 대법사 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와 그의 동생 남주(南舟) 이정립(李定立)은 아무나 의통인패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드는 과정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밝히며 이로부터 운산을 경계(警戒)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모교단의 의통인패 제작법은 청음 남주 두 분이 아는 제작법에서 벗어나 임의로 한 부분이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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