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진법- 조화정부론] 개벽방위는 종립(縱立)아닌 횡립(橫立):후천조화정부 위치와 시스템(1)_예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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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119.♡.137.16) 작성일13-12-09 14:14 조회8,199회 댓글0건본문
예지자작성일13-06-23 01:00조회615회 댓글20건
[증산진법- 조화정부론] 개벽방위는 종립(縱立)아닌 횡립(橫立):후천조화정부 위치와 시스템(1)
증산상제님의 재림은 친정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며,이는 세계조화정부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한다고 인식해야 하며,부분적으로 나타난 천지공사를 종합하면 구체적인 위치와 규모 그리고 체계를 알 수 있다.
너무도 간단한 세계조화정부의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이유는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를 종합해서 크로스 체크를 통한 논리적 해석이 나와야 가능했지만,종단의 이해관계와 자의적 해석에 따라서 의도된 편집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상식적인 내용이어도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1.고수부님을 따르는 직속 성도들은 후천의 방위를 알고 있었다.
고수부님이 운영하는 종단 살림의 파노라마는 천지공사의 실행과정이자,후천의 중심지인 새서울이자 콩밭으로 알려진 태전의 비밀 그리고 후천조화정부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언행들로 가득했다.개벽의 비밀인 지축변화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축이 정립될 것이라는 단순한 가정을 기정사실화 했기 때문에 보고도 알지 못햇던 것이다.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은 방위가 바뀌거나 바르게 서는 정립(正立.定立)을 언급했지 한번도 수직으로 서는 종립(縱立)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다만 여기서는 조화정부의 위치 설정에 대한 방위에 대한 부분만 언급할 예정이며,천지공사에 나타난 정역팔괘와 하도낙서의 현실적 변화에 대해서는 추후 분석할 예정이다.
"용화동 계룡산에서 공사 보심"이라는 장제목의 성구를 보면,자신이 묻혀 나중에 이장되어 올장지의 풍수지리를 보는 내용이 나온다.바로 후천에 바뀔 방위를 예상하여 묘지의 방향을 정한 내용이다.
9월 20일 자정에 태모님께서 주무시다가 일어나시어 갑자기 이용기에게 “바깥을 나가자!” 하시거늘 용기가 태모님을 등에 업고 금산사 가는 길로 올라가던 중 용소(龍沼) 옆에 다다르니 용기의 등에서 내리시어 용소를 이리저리 살피시며 물으시기를 “깊이가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하시므로 용기가 대답하기를 “속설에 명주 실꾸리가 하나 들어가게끔 깊다고들 합니다.” 하매 태모님께서 “그러냐?”하시고 다시 “제비창골로 가자.” 하시니라.
이에 용기가 다시 태모님을 업고 가는데 계룡산(鷄龍山) 정상 바로 아래에 내리시어 “갑갑하구나.” 하시거늘 문득 달이 차차 높아져서 조금씩 환해지더니 마침내 산천이 밝게 보이니라. 태모님께서 물으시기를 “이렇게 되면 앞이 어디가 되냐?” 하시므로 용기가 “선천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이요,후천은 묘좌유향(卯坐酉向)이라고 합니다.” 하고 아뢰니
또 물으시기를 “그러고저러고 앞이 막히지나 않느냐?” 하시매 용기가 “부안 변산까지 막 보입니다.”하고 대답하니라. 이에 태모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러면 너 가서 둘러보아라.” 하시므로 용기가 지리(地理)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나 태모님의 명을 받들어 계룡산 정상에 올라가 변산 쪽을 둘러보고있으니
잠시 후 태모님께서 그곳에 당도하시는지라 용기가 “이쯤 되면 좋겠습니다.” 하고 아뢰니 태모님께서 “여기냐, 여기냐?” 하시며 발로 서너 번 구르시고 “물은 어디로 빠지냐?” 하시거늘 용기가 “당문파(當門破)로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니라.(道典 11:328)
제비창골 인근인 계룡산의 중턱 양지바른 곳에서 고수부님(천황후)과 이용기 성도가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다.자신이 묘지가 될 전경의 방향이 변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풍수지리로 조산이 변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자좌오향이라는 애기는 일반적으로 묘지풍수의 정석은 북쪽에 해당하는 자방향에 머리를 두고 남쪽에 해당하는 오방향에 다리를 두어 몸이 가르키는 방향을 정하는 법칙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후천은 묘좌유향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묘(동쪽)방향에 머리를 두고 유(서쪽)방향에 다리를 두면 후천 방위가 바뀌어 자좌오향으로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 것이다.실제로 계룡산 중턱에서 보면 정상은 묘(동쪽)방향이며 변산은 유(서쪽)방향에 해당한다.일반적인 풍수법도로 보면 서쪽으로 묘지방향을 만드는 것은 금기사항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배치한 것은 후천방위를 미리 알고 있었으며 바뀌는 방위에 맞게 적용해 묘자리 공사를 본 것이며 방위가 바뀌는 후천에 발복되는 것도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수부님의 위상이 왜곡되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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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님이 물이 흘러가는 양상에 대해 질문을 하자,이용기 신도가 당문파로 분석한 내용이 나온다.일반적인 풍수이론으로 본다면,물은 혈(묘지주변)의 우측에서 득수하여 명당에 모인 다음 혈 앞으로 파구되는 것이 당문파 (當門破)라고 불리운다.또한 방향이 반대로 꺽여도 상관없이 S자 태극형태로 굽어지는 것이 좋으나 좌선룡(左旋龍)이 더 좋은 모양이다.
고수부님의 묘지가 동곡약방이 있는 제비산 옆이 아닌 금산사가 있는 계룡산으로 추정하고 해석한다면,금산사에서 내려온 물과 제비산과 계룡산에서 내려온 물이 용화동 명당 앞에서 만나서 파구되고 있다.더 크게 본다면 원평입구에서 두 줄기의 물이 만나고 있는데 멀리 있는 물(원평천)은 내려오는 기운을 막아주고 가까이 있는 물(유각천)은 계화도로 선회하여 서해에 이른다.
묘지의 전경인 조산이 변산반도에 있는 커다란 산이다.변산주봉의 오른쪽이 옥녀봉(여자)이며 왼쪽이 신선봉(남자)이며 변산 앞인 중앙이 쌍선봉(남녀)이 존재해 매우 신비한 조산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증산상제님은 변산이 큰 불기운으로 가득한 형상이라고 강조했으며,자신을 남방 삼이화로 비유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방위가 바뀌어 변산이 남쪽방향으로 배치된다는 것은 충분한 논리적 이유가 될 것이다.
결국,후천의 방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종립해 반듯하게 선다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인 옆으로 누운 형태가 되는 양상이다.즉 동해안이 북쪽이 되고 서해안이 남쪽이 될 것이고, 서울이 서쪽이 되고 남해안이 동쪽이 될 것이다.
참고로 모악산 주변을 풍수로 본다면,백두대간(백두산-금강산)의 맥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속리산-지리산)으로 이어져서 내려오다 그 중심에서 금남호남정맥(마이산)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와 북으로 금남정맥이 충청도 계룡산(수계룡)으로 향하고 남으로 호남정맥이 나와 모악산(암계룡)에서 내장산 무등산까지 내려간다.
상제님께서 암계룡을 택했다는 점에서 모악산 아래에서 태어나고 천지공사를 보셨고 후천 도읍지로 정한 것이다.금강산 기운을 영암 월출산으로 옮기고 무안승달산에 호승예불 기운을 옮기고 무등산에 이마두 구천상제를 봉안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동요동 용화동과 서요동 오성산을 기준으로 보면 남과 북의 방향이 나온다.
고수부님은 증산상제님과 동반 재림할 후천 조화정부이자 콩밭인 요동의 실체를 정확하게 말씀하셨다.단순한 성지가 아니라 용화도장의 중심지이자 새서울의 콩밭(태전)을 교단활동의 구역을 통해 확정하셨다.고수부님이 밝힌 후천 당요의 요동의 구역을 살펴본다면 후천에 이루어질 방위도 밝혀진다.
"증산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증산 오시리라." 하시더니, 조금 있다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라고 세번 거듭 말씀하신 뒤에 눈을 감으시고 선화하시니 새벽 두시라. (천후신정기)
십삼척 미륵불을 쌍으로 모시나니 오성산과 용화동에 건립하고 세우니라. (선도신정경)
증산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천하만방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조화정부를 열였느니라. 천지만신이 나를 한결같이 원하여 추대하니 나는 후천의 당요이니라. 국호는 대시(大時)이니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용화동은 동요동(東堯洞)이요, 건곤(乾坤)의 사당(祠堂) 자리이니 미륵이 다시 서니라.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나니 법은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것 아니더냐. ( 道典 11:365)
오성산은 오선위기(五仙圍碁), 두 신선은 바둑 두고 두 신선은 훈수하고 갈 적에는 바둑판과 바둑은 놓고 간다 .오성산에 오성(五聖)이 있고, 성덕리(聖德里)가 있고, 서요동(西堯洞)이 있고, 사옥(沙玉)개가 있느니라.(道典 11:369)
"오성산에는 오성이 있고 오성산에는 서요동이 있고 오성산에는 사옥재가 있지 아니하더냐. 이 곳이 오성산이니,오선위기 도수를 끌어다가 이 곳에 붙여 쓰니라. 오선위기 도수에 '두 신선은 바둑을 두고 두 신선은 훈수를 하다가 돌아갈 때에는 바둑판과 바둑돌은 두고 가리라."하셨지 않느냐. (선도신정경)
위 내용을 본다면,고수부님의 마지막 유언이 담긴 천후신정기를 보면 증산상제님과 동반강림한다라는 점을 분명히 애기한다.그리고 선도신정경에 보면 쌍미륵의 정음정양 신앙이 정립되는 상징으로 쌍미륵의 건곤사당이 오성산인 서요동과 용화동인 동요동에 건립된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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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의 천지개벽경에는 문명신을 거느리고 조화정부를 여는 친정체계를 제시하고 있으며,후천 당요의 자격으로 후천 오만년을 다스리는 지상의 황극제라는 사실도 제시하고 있다.그 조화정부의 근거지가 요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구전으로 내려오는 용화동이 동요동이며 오성산이 서요동이므로 후천 방위까지 고려한 전설임을 알 수 있다.
증산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고부, 정읍, 태인, 부안, 김제와 전주, 순창, 익산, 옥구, 함열로 수도를 삼아 현 서울(당시의 한성)의 7배나 넓은 곳에서 문무백관이 정사를 보게 하리라. 내가 거하는 (대시국 수도의) 북문은 전주에세워지노라. 때가 되면 모악산 금산사는 인산인해를 이루리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오성산은 만국 영사관 자리요 서대문 팔십리는 저기 있는 계화도요 평사리는 나의 평상이니라(선도신정경)
위 내용을 본다면,상제님이 거하는 곳의 중심에서 북쪽에 북문을 만든다고 했는데,그곳이 바로 전주(완주포함)에 해당된다고 설명하고 있다.동요동과 서요동의 중심에서 본다면 전주가 북쪽에 해당되며 방향이 바뀐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쪽에 해당하는 방향이 계화도인데 선도신정경에는 서대문 팔십리로 기록되었다.이는 두가지로 해석해야 한다.서요동의 영역이 계화도까지 확장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제비산과 수양산에서 시작한 용화도장의 확장영역이 계화도일 수 있다.
아니면 새로운 대문을 의미하는 새대문으로 말씀하신 것을 서쪽에 있기때문에 서대문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기록자는 후천에 방위가 바뀐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기록일 수도 있다.계화도는 육지개간이 이루어지는 새만금 지역으로 새로운 대문인 남대문의 역활로 문명개화삼천국의 문화도시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3.동요동의 핵심인 원평대기지와 용화기지의 중요성과 좌우 황제궁의 역활
증산상제님은 동요동인 용화동을 기지이며,원평을 대기지라고 표현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모와 기능 그리고 후천조화정부의 시스템을 알 수 있는 성구를 통해 유추해 본다.
어느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일후에 때가 되면 천하만국의 제왕신과 이십사장은 금산사를 옹위하고 이십팔장은 용화기지를 옹위하며 삼만의 철기신장은 원평장상 대기지를 옹위하리라." 하시고,(정영규의 천지개벽경)
상제님께서 구릿골 앞 큰 정자나무 밑에서 소풍하실 때 항상 금산 안과 용화동(龍華洞)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나의 기지(基址)라. 장차 꽃밭이 될 것이요,(道典 7:77)
말씀하시기를 “옛집을 다시 찾는다는 말이니라. 이곳은 제비창골이 아니요 제업창골(帝業創谷)이니라.” 하시니라.하루는 하운동에 사는 박성태(朴成台)에게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제비창골에 날마다 백 명씩은 왕래하리라.” 하시고“그러나 여지가 좋지 못하다.” 하시니라. (道典 3:13)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우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일후에 광제(廣濟)하러 나갈 때에는 용봉기(龍鳳旗)와장군기(將軍旗)를 원평에 꽂아라. 원평이 이제 장상기지(將相基址)니라.” 하시고 (道典 6:114)
제왕신과 이십사장이 옹위하는 금산사는 파르테논과 같은 세계신전이 들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이십필장이 옹위하는 용화동은 건곤사당이 들어서는 내원궁의 중심궁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상제님이 천지공사를 보시는 동곡약방은 잠자리를 하는 황제궁(주거궁)이 들어설 가능성이 존재하고,위쪽 제업창골은 업무를 보는 집무를 보는 황제궁(집무궁)이 들어설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 하루는 구릿골 앞 금난바위(金生巖)를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금암문(金巖門)이니라. 이곳에서부터 금산사까지는 문(門) 안이요, 이곳에서 원평 쪽으로는 문 밖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7:77)
위 내용을 보면,용화기지에 들어서는 내원궁과 원평대기지에 들어서는 외원궁이 명확히 구분된다.내원궁은 일반사람들이 살지못하는 봉금지역인 청화대와 같은 역활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산사 황금대맥은 천지의 대용맥(大龍脈)이니 누구든지 가히 범접치 못하리라.”하시니라. (道典 7:77)
하루는 형렬을 불러 가라사대 "오늘은 천하신명을 제비창고로 몰아들일 참이니, 놀래지 말라. 제비창고 아니고는 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시고, 조금 있다가 형렬을 보고 "놀래지 말고 문밖을 내다보라" 하시기로 형렬이 나서서 볼라하니 "눈을 감고 보라" 하시기로 눈을 감고 바라보니 운무(雲霧)가 자욱한데 기치검극(旗幟劒戟)이 볕 저리듯 한데, 귀귀괴괴한 신장들이 말을 달리여 동구(洞口)로 몰아 제비창고로 달려드는 통에 어찌놀랬든지 "그만 보사이다" 하고 눈을 뜨니, 선생님이 웃으시며"무섭느냐. 거짓말 같제야. 일후에 제비창고를 보라. 구중궁궐이 삼대같이 들어선 뒤 정신 부족한 놈은 보기가 어려우리라. ○○○○를 잘 기억하라" 그 후부터는 형렬이 신명 소리만 하시면 더욱 열열 복종하는지라(동곡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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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보면,금산사가 천지의 대용맥이 나오는 곳임을 알 수 있으며,그 위에 위치한 제비창골에서 업무를 보는 곳임을 알 수 있다.제비창고의 지역이 아니면 상제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애기하는 대목에서 황제 집무궁이 들어서는 자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이곳을 중심으로 구중궁궐이 빽빽하게 들어선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구절이다.그리고 여지가 좁아 불칼로 인근 산을 옮긴다는 공사 내용으로 보아 엄청난 규모의 왕궁이 들어서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루는 형렬을 불러 모악산을 가리키시며 “사람 같으면 눈이 어디쯤 되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형렬이 대하여 아뢰기를 “금산사가 눈이 될까요?” 하는지라 상제님께서 웃으시며 “눈이 입에 가서 붙었더냐?(중략) 상제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그러면 젖은 어디만큼 되겠느냐?” 하시니 형렬이 “구릿골쯤 될까 합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그것은 네가 잘 보았다. 그러나 젖은 양쪽에 있는데 물이 양쪽에 있느냐?”하시니 “청도원 골짜기에 물이 많습니다.” 하고 아뢰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그래, 그것은 네가 잘 본 듯싶다. 양쪽 젖을 한 사람이 먹으니, 구릿골 앞에 둠벙이 있느냐?” 하시므로 형렬이 여쭈기를 “예, 깊은 소(沼)가 있습니다.”
하매 “그래야지.” 하시고 친히 가서 보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좀 컸으면 좋겠다.” 하시고 또 “여기가 젖 같으면 구릿골 약방이 잘되었구나.” 하시니라. (道典 4:105)
위 내용을 보면,모악산을 사람에 비유한 내용이 나오는데,사람의 입에 해당하는 곳이 금산사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며,젖에 해당하는 곳이 제비창골이 있는 청도원 골짜기와 동곡 약방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상제님께서 금평저수지 공사를 통해 엄청나게 큰 낙반사유의 기운을 담으셨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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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용화도장 팔십리 규모와 수양산과 평사리의 위치 그리고 대학교 도수
상제님의 성지가 곧 후천조화정부가 들어서는 수도이자 문명을 여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천지공사를 통해 알수 있다.후천에 들어설 용화도장의 크기가 워낙 방대해 팔십리를 뻗어간다는 것을 천지공사를 통해 확정했다.
"옛 말에 이르기를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 간다.'고 하는 말과 같이,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용화도장은 장광(長廣)이 팔십리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태모님께서 용화동으로 가시다가 팥정이에 앉으시어 구릿골 입구 돌다리를 겨누며 말씀하시기를 “저기가 천지 문턱이니 제비산에서 장광(長廣) 팔십 리가 꼭 차느니라.” 하시고 (道典 11:308)
고후비께서 용화동으로 오시다가 팥정이에 앉아 쉬실세, 구릿골 입구 돌다리를 담뱃대로 겨누시며 가라사대 "저기가 천지 문턱이니라." 이어서 가라사대 "이곳에서 장광 팔십리가 꼭 차니라." 하시고 (선도신정경)
천후 수양산을 바라보시며 가라사대 "구성속에 수양산이 결실하였도다. 후천오만년 운수의 본원지가 이곳이라. 속설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라는 말이 이곳을 두고 나온 말이니, 잘 기억하여 두라."하시니라. (천후신정기)
태모님께서 수양산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구성(九城) 속에 수양산이 결실하였도다.” 하시고 다시 용소로 가시어 “멀지도 않구나.” 하시더니 “후천 오만년 운수는 음양이 근본이니라.” 하시며 “속설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라는 말이 이곳을 두고 나온 말이니 잘 기억하여 두라.”하시니라. (道典 11:348)
위 내용을 보면,용화도장의 시작점이 제비산과 용화동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수양산 그늘이 강동팔십리를 간다"라는 구절을 천지공사로 차용했는데 수양산이 바로 구성산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즉 구성산 아래와 제비산과 용화동 아래인 원평에서 시작하는 것이 용화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후신정기와 도전에서 나온 수양산(구성산)에 대한 설명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천후 신정기에 나온 구성산은 <후천오만년 운수의 본원지>라고 설명한 반면,도전에 나온 구성산은 <후천오만년 운수는 음양의 근본>으로 바뀌었다.전자를 읽으면 이곳이 용화도장의 출발이자 명당으로 인식하게 되지만 후자를 읽으면 구성산의 기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기 어려운 후천오만년 운수의 성격만 설명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정읍 산외 평사리(山外 平沙里)를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하여 피난처로 알고 있으니 그 기운을 빼리라.” 하시니라.(중략) 이와 같이 한참을 행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평사낙안 기운을 원평으로 돌렸노라.” 하시고 (道典 5:187)
“제비산 흙을 쓸 때가 있네. 평사리(坪沙里)는 나의 평상(平床)터네.” 하시니라. (道典 11:308)
오성산은 만국 영사관 자리요 서대문 팔십리는 저기 있는 계화도요 평사리는 나의 평상이니라(선도신정경)
위 내용을 보면,평사낙안이 예언서에 나오는 구원의 길지라는 것이 많이 퍼진 것을 알 수 있으며,상제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사람들이 용화동의 남쪽이자 정읍의 동쪽 산 골짜기인 산외면 평사리를 평사낙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기운을 원평으로 옮기는 공사를 보셨는데 원평의 북쪽이자 구성산 아래 김제시 봉남면 평사리로 옮긴 것이다.
태모님은 평사리를 자신의 평상터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제비산 흙의 기운을 옮겨 별궁이자 용화동의 시작점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치 인도의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인 성지이자 용화 내원궁의 별궁이자 원평대기지의 양대 축을 삼는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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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리면 10리가 4키로이므로 32키로를 뻗어간다는 내용인데,그 방향이 계화도로 가면 새만금 바닷가에 도달하며 새(서)대문 팔십리의 구정확정이 되며,서요동으로 뻗어가면 오성산 아래에 임피에서 멈춘다.이곳이 바로 만국영사관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는 자리에 해당한다.즉 천지공사에 나타난 후천조화정부가 들어서는 구역과 용화도장은 융합되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금구 내주평에 계실 때 평사리(平沙里)에 자주 다니시며 어린아이들의 심성을 살피시거늘 아이들을 보실 때마다 “너 커서 뭐 되고 싶냐? 너는 뭐 되고 싶냐?” 하고 물으시니라. (道典 9:8)
위 내용을 보면 평사리가 용화도장의 출발이기 때문에 상제님께서도 초립동에 해당하는 국내외 유학 구도인의 미래를 암시하는 공사를 보신 것으로 이해된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장차 ○○○에다 동대문 달고, ○○ ○○에다 남대문 달고 ○○○에다 서대문 달고, ○○○에다 북대문 달아 세계 사람들을 가르치는 큰 도시를 만들 것이니라.후천선경에는 판이 이렇게 크리라. 세계 창생이 모여 내 도를 공부하리니 너희는 잘 닦아 그들을 가르치라.”하시니라.(道典 7:92)
위 내용은 <세계 창생을 가르치는 교도시(敎都市) 건설>장제목의 도전 성구 내용이다.교육도시임에도 수도의 성곽처럼 4대문 공사를 보신 내용이 나온다.물론 지명은 비밀로 처리했지만 다른 책에서는 북문이 전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용화도장의 구역과 조화정부의 구역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내 ‘태을주를 읽으면 신의 감화가 내린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므로 성도들도 이로부터 태을주를 읽는 것으로 수련을 행하기 시작하니라. 이로써 일찍이 상제님께서 “경학의 집에 대학교(大學校)를 설치한다.” 하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리라.” 하신 말씀이 응험되니라. (道典 10:90)
위 내용을 보면 김경학의 이름기운을 빌려 대학교도수 공사를 보시는 대목이다.바로 태을주 수련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그런데 김경학은 태인 백암리(泰仁 白岩里)에 사는 성도이다.즉 동요동의 중심지에서 아래로 내려간 지역이지만 대학교가 들어서는 지역을 의미한 것이다.태인(泰仁)은 태을주를 수련하는 사람으로 음차한다면 태인(太人)이 되며 이곳이 태전(太田)이 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서울에서 장광 팔십 리를 다니시며 공사를 마치시고 익산 금마면(金馬面) 미륵사지(彌勒寺址)에 이르시어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미륵세존이냐? 미륵신이냐?” 하시니 성도들이 대답하기를 “미륵신이지요.” 하니라.상제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불러야 하느냐,유아독신(唯我獨身)으로 불러야 하느냐?” 하시니 공우가 “유아독신으로 불러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거늘상제님께서 다시 “그럼 거기에다 대(大) 자를 붙여야 하느냐, 콩 태(太) 자를 붙여야 하느냐?” 하고 물으시니라.이에 공우와 다른 성도들 모두 머뭇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대(大) 자에 점 하나 찍으면 콩 태(太) 자니라.” 하시고 익산 용안(龍安)과 태인을 들러 대흥리로 돌아오시어 돼지를 잡아 천지에 제를 지내시니라. (道典 5:338)
위 내용을 보면,익산 미륵사지도 콩밭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서울에서 장광 팔십 리를 다니시며 공사를 마치시고>는 새서울의 영역이자 콩밭(태전)의 영역이 동요동과 서요동인 장광 팔십리에 걸쳐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실제 팔십리 동서남북 영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사를 보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현 서울에서 장광 팔십리 공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서울인 동요동과 서요동을 돌아다는 것이기 때문에 의도된 편집 실수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증산상제님 자신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닌 유아독신이라고 한 것은 삼신일체의 유일신을 강조하신 것이며 그 앞에 태자를 붙여 태유아독신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콩밭의 미륵불 영역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이곳 미륵사지는 백제시대 미륵불 강림을 예견하는 서동왕자 무왕의 간절한 소망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상제님께서 금산사 미륵불 다음으로 인정한 제정일체의 신앙정신이 깃든 곳이다.그런데 이곳지명이 왕궁면으로 왕의 궁전이 들어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지명의 예언력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곳이라 볼 수 있다.동요동과 서요동의 중심축에서 90도 각도로 펼치면 동북쪽에 위치한 곳이 익산미륵사지인 것이다.
5.고수부님의 둘째살림 조종리는 후천건설의 푯대이자 조화정부의 중심지이다.
고수부님이 정읍 대흥리에서 첫째 살림을 마무리 하고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 영향권을 떠나 둘째 살림을 차린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가 예언서에 등장하는 십승지의 계룡백석이며 후천조화정부의 중심지이자 콩밭(태전)의 푯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요동의 상징인 오성산 정상에서 용화동 금산사까지 정확하게 40키로 떨어져 있다.그리고 그 중심지역이 바로 조종리라는 믿기지 여러운 지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서요동인 오성산은 마지막 선화하기 전 은둔 장소이기 때문에 미리 중간지역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 조종리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이름에서도 마루 종(宗)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100리를 상징하는 100에 100을 곱하면 일만리가 되는 상징적인 위치이며 주변에 만경(萬頃)이라는 지명(만경읍 만경저수지)이 있어 가득하고 완전한 서울(萬京)을 의미하는 곳이다.도술운통구만리의 상징이자 용화도장의 중심지이자 조화정부 36만간 옥경대가 들어설 준비된 곳이다.
조종리는 강씨가 150호 정도 사는 집성촌(集姓村)이요, 그 가운데 대여섯 명이 신도라.이들이 중조(中祖) 마을에 있는 오두막집에 임시 거처를 정하여 한 달간 태모님을 모시다가 이어 하조(下祖) 마을 응칠의 집으로 옮겨 모시거늘 (중략)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니 마땅히 농업에 힘쓸 것이요 포교 운동은 오직 천명을 좇아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릴 것이며,오는 자는 오고 가는 자는 가게 하여 그들의 뜻에 맡김이 옳으니라.” 하시니라. (道典 11:47)
10월 중순에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金堤郡 白山面 祖宗里)에 사는 강응칠(姜應七), 강사성(姜四星),강원섭(姜元?) 등 강씨 신도들이 종서의 집에 찾아와 태모님께 여쭈기를 “상제님께서는 저희들과 동종간(同宗)이며 수부님께서는 저희들의 사모님이시니 저희들이 모실 것입니다.” 하고 여러 차례 청하니(중략) 이에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姓氏) 하나 보고 가노라.” 하시며 허락하시니라. (道典 11:46)
고수부께서 무오(1918)년 9월 19일 대흥리를 떠나 조종골로 오실 때, 약장을 아니 가지고 빈 몸으로 오셨으므로,이제 약장을 짜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약장의 밑의 칸은 큰 칸 하나를 두시고 그 위의 칸은 사상에 응하여 빼닫이 네 칸을 횡으로 두시고 아래칸 바닥에다 경면주사로 붉은 점을 둥글게 스물넉점을 돌려 찍으시고 그 중앙에다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시고 글 쓴 위에다 설문(舌門)이라고 두 자를 불지져 낙서(烙書)하시고 약장 안벽에다가 이와같이 쓰시니라.
「강증산 소유(姜甑山 所有)
여동빈지 조화권능(呂童賓之 造化權能)
강태공지 도술(姜太公之 道術)
신농씨지 유업(神農氏之 遺業)
단주수명(丹朱受命)」
그리고 이 약장을 둔궤(遁櫃)라 부르시고 또는 신독(神독)이라고도 부르게 하신 바, 약방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앞에 돈을 놓고 절을 하게 하시어 이 법을 엄격히 지키도록 명령하시어, 누구든지 반드시 실행하게 하시니라. (선도신정경)
조종리에는 상조 중조 하조 마을이 있으며,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증산상제님의 소유이자 종통임을 암시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수부님이 조종리로 가는 절대적인 이유를 강씨의 집성촌이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 고수부님이 천지공사를 보실때 <강증산 소유>라 명시하여 증산상제님이 후일 조화정부를 열어 친정체계를 구축하실 것을 천명한다.이곳이 가장 중요한 조화정부의 중심이자 푯대를 세운다는 것을 암시하는 언행을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모님께서 조종리에 계실 때 출행하시는 일이 많지 않으나 혹 대흥리나 먼 곳으로 행차하실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시어 기차를 타시거늘(중략) 태모님께서 돌아오실 때는 가마꾼들이 미리 부용역에 나가 대기하다가 모시고 오는데 조종리에 당도하시면 당산(堂山) 마을에 있는 당산나무를 한 바퀴 돌고 도장으로 들어가시니라. (道典 11:107)
고수부님이 조정리 도장으로 바로 들어가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당산마을의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탑돌이를 하는 행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곳이 후천조화정부의 중앙이자 태을주 판인 콩밭의 중심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백산면 조종리가 단순한 둘째 살림의 근거지가 아니라 개벽이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할 것을 예언하는 격암유록 구절을 보면 중요한 의미를 알 것이다.
(제 2부로 이어집니다.)
4.용화도장 팔십리 규모와 수양산과 평사리의 위치 그리고 대학교 도수
상제님의 성지가 곧 후천조화정부가 들어서는 수도이자 문명을 여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천지공사를 통해 알수 있다.후천에 들어설 용화도장의 크기가 워낙 방대해 팔십리를 뻗어간다는 것을 천지공사를 통해 확정했다.
"옛 말에 이르기를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 간다.'고 하는 말과 같이,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용화도장은 장광(長廣)이 팔십리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태모님께서 용화동으로 가시다가 팥정이에 앉으시어 구릿골 입구 돌다리를 겨누며 말씀하시기를 “저기가 천지 문턱이니 제비산에서 장광(長廣) 팔십 리가 꼭 차느니라.” 하시고 (道典 11:308)
고후비께서 용화동으로 오시다가 팥정이에 앉아 쉬실세, 구릿골 입구 돌다리를 담뱃대로 겨누시며 가라사대 "저기가 천지 문턱이니라." 이어서 가라사대 "이곳에서 장광 팔십리가 꼭 차니라." 하시고 (선도신정경)
천후 수양산을 바라보시며 가라사대 "구성속에 수양산이 결실하였도다. 후천오만년 운수의 본원지가 이곳이라. 속설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라는 말이 이곳을 두고 나온 말이니, 잘 기억하여 두라."하시니라. (천후신정기)
태모님께서 수양산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구성(九城) 속에 수양산이 결실하였도다.” 하시고 다시 용소로 가시어 “멀지도 않구나.” 하시더니 “후천 오만년 운수는 음양이 근본이니라.” 하시며 “속설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라는 말이 이곳을 두고 나온 말이니 잘 기억하여 두라.”하시니라. (道典 11:348)
위 내용을 보면,용화도장의 시작점이 제비산과 용화동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수양산 그늘이 강동팔십리를 간다"라는 구절을 천지공사로 차용했는데 수양산이 바로 구성산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즉 구성산 아래와 제비산과 용화동 아래인 원평에서 시작하는 것이 용화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후신정기와 도전에서 나온 수양산(구성산)에 대한 설명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천후 신정기에 나온 구성산은 <후천오만년 운수의 본원지>라고 설명한 반면,도전에 나온 구성산은 <후천오만년 운수는 음양의 근본>으로 바뀌었다.전자를 읽으면 이곳이 용화도장의 출발이자 명당으로 인식하게 되지만 후자를 읽으면 구성산의 기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기 어려운 후천오만년 운수의 성격만 설명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정읍 산외 평사리(山外 平沙里)를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하여 피난처로 알고 있으니 그 기운을 빼리라.” 하시니라.(중략) 이와 같이 한참을 행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평사낙안 기운을 원평으로 돌렸노라.” 하시고 (道典 5:187)
“제비산 흙을 쓸 때가 있네. 평사리(坪沙里)는 나의 평상(平床)터네.” 하시니라. (道典 11:308)
오성산은 만국 영사관 자리요 서대문 팔십리는 저기 있는 계화도요 평사리는 나의 평상이니라(선도신정경)
위 내용을 보면,평사낙안이 예언서에 나오는 구원의 길지라는 것이 많이 퍼진 것을 알 수 있으며,상제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사람들이 용화동의 남쪽이자 정읍의 동쪽 산 골짜기인 산외면 평사리를 평사낙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기운을 원평으로 옮기는 공사를 보셨는데 원평의 북쪽이자 구성산 아래 김제시 봉남면 평사리로 옮긴 것이다.
태모님은 평사리를 자신의 평상터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제비산 흙의 기운을 옮겨 별궁이자 용화동의 시작점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치 인도의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인 성지이자 용화 내원궁의 별궁이자 원평대기지의 양대 축을 삼는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한 원본 크기로 볼수 있습니다. >
팔십리면 10리가 4키로이므로 32키로를 뻗어간다는 내용인데,그 방향이 계화도로 가면 새만금 바닷가에 도달하며 새(서)대문 팔십리의 구정확정이 되며,서요동으로 뻗어가면 오성산 아래에 임피에서 멈춘다.이곳이 바로 만국영사관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는 자리에 해당한다.즉 천지공사에 나타난 후천조화정부가 들어서는 구역과 용화도장은 융합되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금구 내주평에 계실 때 평사리(平沙里)에 자주 다니시며 어린아이들의 심성을 살피시거늘 아이들을 보실 때마다 “너 커서 뭐 되고 싶냐? 너는 뭐 되고 싶냐?” 하고 물으시니라. (道典 9:8)
위 내용을 보면 평사리가 용화도장의 출발이기 때문에 상제님께서도 초립동에 해당하는 국내외 유학 구도인의 미래를 암시하는 공사를 보신 것으로 이해된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장차 ○○○에다 동대문 달고, ○○ ○○에다 남대문 달고 ○○○에다 서대문 달고, ○○○에다 북대문 달아 세계 사람들을 가르치는 큰 도시를 만들 것이니라.후천선경에는 판이 이렇게 크리라. 세계 창생이 모여 내 도를 공부하리니 너희는 잘 닦아 그들을 가르치라.”하시니라.(道典 7:92)
위 내용은 <세계 창생을 가르치는 교도시(敎都市) 건설>장제목의 도전 성구 내용이다.교육도시임에도 수도의 성곽처럼 4대문 공사를 보신 내용이 나온다.물론 지명은 비밀로 처리했지만 다른 책에서는 북문이 전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용화도장의 구역과 조화정부의 구역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내 ‘태을주를 읽으면 신의 감화가 내린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므로 성도들도 이로부터 태을주를 읽는 것으로 수련을 행하기 시작하니라. 이로써 일찍이 상제님께서 “경학의 집에 대학교(大學校)를 설치한다.” 하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리라.” 하신 말씀이 응험되니라. (道典 10:90)
위 내용을 보면 김경학의 이름기운을 빌려 대학교도수 공사를 보시는 대목이다.바로 태을주 수련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그런데 김경학은 태인 백암리(泰仁 白岩里)에 사는 성도이다.즉 동요동의 중심지에서 아래로 내려간 지역이지만 대학교가 들어서는 지역을 의미한 것이다.태인(泰仁)은 태을주를 수련하는 사람으로 음차한다면 태인(太人)이 되며 이곳이 태전(太田)이 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서울에서 장광 팔십 리를 다니시며 공사를 마치시고 익산 금마면(金馬面) 미륵사지(彌勒寺址)에 이르시어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미륵세존이냐? 미륵신이냐?” 하시니 성도들이 대답하기를 “미륵신이지요.” 하니라.상제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불러야 하느냐,유아독신(唯我獨身)으로 불러야 하느냐?” 하시니 공우가 “유아독신으로 불러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거늘상제님께서 다시 “그럼 거기에다 대(大) 자를 붙여야 하느냐, 콩 태(太) 자를 붙여야 하느냐?” 하고 물으시니라.이에 공우와 다른 성도들 모두 머뭇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대(大) 자에 점 하나 찍으면 콩 태(太) 자니라.” 하시고 익산 용안(龍安)과 태인을 들러 대흥리로 돌아오시어 돼지를 잡아 천지에 제를 지내시니라. (道典 5:338)
위 내용을 보면,익산 미륵사지도 콩밭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서울에서 장광 팔십 리를 다니시며 공사를 마치시고>는 새서울의 영역이자 콩밭(태전)의 영역이 동요동과 서요동인 장광 팔십리에 걸쳐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실제 팔십리 동서남북 영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사를 보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현 서울에서 장광 팔십리 공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서울인 동요동과 서요동을 돌아다는 것이기 때문에 의도된 편집 실수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증산상제님 자신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닌 유아독신이라고 한 것은 삼신일체의 유일신을 강조하신 것이며 그 앞에 태자를 붙여 태유아독신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콩밭의 미륵불 영역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이곳 미륵사지는 백제시대 미륵불 강림을 예견하는 서동왕자 무왕의 간절한 소망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상제님께서 금산사 미륵불 다음으로 인정한 제정일체의 신앙정신이 깃든 곳이다.그런데 이곳지명이 왕궁면으로 왕의 궁전이 들어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지명의 예언력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곳이라 볼 수 있다.동요동과 서요동의 중심축에서 90도 각도로 펼치면 동북쪽에 위치한 곳이 익산미륵사지인 것이다.
5.고수부님의 둘째살림 조종리는 후천건설의 푯대이자 조화정부의 중심지이다.
고수부님이 정읍 대흥리에서 첫째 살림을 마무리 하고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 영향권을 떠나 둘째 살림을 차린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가 예언서에 등장하는 십승지의 계룡백석이며 후천조화정부의 중심지이자 콩밭(태전)의 푯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요동의 상징인 오성산 정상에서 용화동 금산사까지 정확하게 40키로 떨어져 있다.그리고 그 중심지역이 바로 조종리라는 믿기지 여러운 지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서요동인 오성산은 마지막 선화하기 전 은둔 장소이기 때문에 미리 중간지역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 조종리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이름에서도 마루 종(宗)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100리를 상징하는 100에 100을 곱하면 일만리가 되는 상징적인 위치이며 주변에 만경(萬頃)이라는 지명(만경읍 만경저수지)이 있어 가득하고 완전한 서울(萬京)을 의미하는 곳이다.도술운통구만리의 상징이자 용화도장의 중심지이자 조화정부 36만간 옥경대가 들어설 준비된 곳이다.
조종리는 강씨가 150호 정도 사는 집성촌(集姓村)이요, 그 가운데 대여섯 명이 신도라.이들이 중조(中祖) 마을에 있는 오두막집에 임시 거처를 정하여 한 달간 태모님을 모시다가 이어 하조(下祖) 마을 응칠의 집으로 옮겨 모시거늘 (중략)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니 마땅히 농업에 힘쓸 것이요 포교 운동은 오직 천명을 좇아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릴 것이며,오는 자는 오고 가는 자는 가게 하여 그들의 뜻에 맡김이 옳으니라.” 하시니라. (道典 11:47)
10월 중순에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金堤郡 白山面 祖宗里)에 사는 강응칠(姜應七), 강사성(姜四星),강원섭(姜元?) 등 강씨 신도들이 종서의 집에 찾아와 태모님께 여쭈기를 “상제님께서는 저희들과 동종간(同宗)이며 수부님께서는 저희들의 사모님이시니 저희들이 모실 것입니다.” 하고 여러 차례 청하니(중략) 이에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姓氏) 하나 보고 가노라.” 하시며 허락하시니라. (道典 11:46)
고수부께서 무오(1918)년 9월 19일 대흥리를 떠나 조종골로 오실 때, 약장을 아니 가지고 빈 몸으로 오셨으므로,이제 약장을 짜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약장의 밑의 칸은 큰 칸 하나를 두시고 그 위의 칸은 사상에 응하여 빼닫이 네 칸을 횡으로 두시고 아래칸 바닥에다 경면주사로 붉은 점을 둥글게 스물넉점을 돌려 찍으시고 그 중앙에다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시고 글 쓴 위에다 설문(舌門)이라고 두 자를 불지져 낙서(烙書)하시고 약장 안벽에다가 이와같이 쓰시니라.
「강증산 소유(姜甑山 所有)
여동빈지 조화권능(呂童賓之 造化權能)
강태공지 도술(姜太公之 道術)
신농씨지 유업(神農氏之 遺業)
단주수명(丹朱受命)」
그리고 이 약장을 둔궤(遁櫃)라 부르시고 또는 신독(神독)이라고도 부르게 하신 바, 약방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앞에 돈을 놓고 절을 하게 하시어 이 법을 엄격히 지키도록 명령하시어, 누구든지 반드시 실행하게 하시니라. (선도신정경)
조종리에는 상조 중조 하조 마을이 있으며,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증산상제님의 소유이자 종통임을 암시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수부님이 조종리로 가는 절대적인 이유를 강씨의 집성촌이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 고수부님이 천지공사를 보실때 <강증산 소유>라 명시하여 증산상제님이 후일 조화정부를 열어 친정체계를 구축하실 것을 천명한다.이곳이 가장 중요한 조화정부의 중심이자 푯대를 세운다는 것을 암시하는 언행을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모님께서 조종리에 계실 때 출행하시는 일이 많지 않으나 혹 대흥리나 먼 곳으로 행차하실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시어 기차를 타시거늘(중략) 태모님께서 돌아오실 때는 가마꾼들이 미리 부용역에 나가 대기하다가 모시고 오는데 조종리에 당도하시면 당산(堂山) 마을에 있는 당산나무를 한 바퀴 돌고 도장으로 들어가시니라. (道典 11:107)
고수부님이 조정리 도장으로 바로 들어가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당산마을의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탑돌이를 하는 행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곳이 후천조화정부의 중앙이자 태을주 판인 콩밭의 중심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백산면 조종리가 단순한 둘째 살림의 근거지가 아니라 개벽이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할 것을 예언하는 격암유록 구절을 보면 중요한 의미를 알 것이다.
(제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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